“친구들도 무슨 오지랖이냐고 해요. 가진 거 남에게 다 주고 사는데 뭐가 좋아서 세상 다 가진 듯 미소 지으며 사냐고요. 전 그럴 때마다 ‘행복하니까’라고 말합니다.”
‘미아리텍사스’라고도 불리는 서울 하월곡동 집창촌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이미선(55)씨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차 한 대 없이 살면서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중고차를 선뜻 기부할 수 있는 ‘오지랖’이 끊임없는 미소의 원천인 듯했다. 29일 약국에서 만난 이씨는 “나눠주고 품어주고 살면 내가 더 행복해지고 더 젊고 건강해진다”며 “이렇게 사는 게 내 천성인 것 같다”고 말했다.
4호선 길음역과 맞닿아 있는 ‘미성년자 출입금지’ 구역 속칭 미아리텍사스는 대도시 속의 섬 같은 공간이다. 이씨는 이 곳을 “존재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어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10년 넘게 지지부진한 재개발 사업에 묶인 탓에 낡은 건물과 폐가가 뒤섞여 있어 폐광촌 같은 스산한 느낌마저 드는 이 곳에서 그는 나눔을 실천하며 20년간 집창촌 사람들의 ‘약사 이모’로 일하고 있다.
목 좋은 곳을 놔두고 왜 하필 이곳에 약국을 열었을까. 그는 “여기가 내 고향”이라며“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게 있었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초등학생 때 우리 집을 사이에 두고 양쪽이 다 술집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일하는 언니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저를 유독 예뻐해 주던 언니 한 분이 자살을 했어요. 제가 본 첫 죽음이었고 그 충격은 지금까지도 생생해요.”
어른이 되면 공장을 지어 언니들에게 다른 곳보다 많은 월급의 일자리를 만들어주겠다는 소녀의 꿈은 약사로 바뀌었다. 대학 다닐 땐 학생운동 하다 옥살이도 했고 결혼해서 노동운동을 했다. 결혼 10년 만에 파경을 겪었고 보증을 잘못 선 탓에 억대의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다. “내일 아침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잠자리에 들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는 미아리텍사스에 약국을 열며 삶의 희망을 찾았다. 빚을 조금씩 갚아가면서 이곳 사람들과 조금씩 친구가 된 것이다. 이씨는 “집창촌 사람들에게 애정이 솟구치는 이유는 내가 바닥을 쳐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20년 전 집창촌 한가운데 약국을 열고 이웃의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방법은 단 하나. “기다리고 참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이 곳 사람들과 친구가 됐다.
이미선씨가 최근 약국 한 편에 집창촌 여성들을 위한 교육ㆍ상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포털사이트 다음에 ‘스토리펀딩’을 시작했다. 독거노인과 가출청소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 등을 돕는 일까지 함께하다 보니 혼자 힘으론 한계를 느껴서였다. 약국 내 상담센터에서는 상담은 물론, 악기를 함께 배우거나 인형, 비누, 화장품 만들기 같은 프로그램도 진행할 계획이다. 2월 29일 시작해 4월 30일까지 이어지는 스토리펀딩은 이미 목표 모금액인 700만원을 훌쩍 넘겼다. 악의적인 댓글을 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금전적인 도움은 물론 재능 기부를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씨의 다음 꿈은 인근에 있는 빈 집을 빌려 제대로 된 상담센터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4년 전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도 땄다. 청소년상담센터를 만들겠다는 꿈도 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인간의 영혼만큼 귀한 게 없잖아요. 그게 제 삶의 신조입니다. 조금 힘들고 고생하며 살더라도 기쁨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큼 큰 축복은 없는 것 같습니다.”
31일 헌법재판소가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헌재 결정에 대해 내 입장을 얘기하는 건 부적절하다”면서도 “앞으로 이웃 여성들에게 더 많은 어려움이 닥칠 것으로 보여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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