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종횡무진 기자
향우회 설립 궂은 일 ‘척척’
목소리 쩌렁한 ‘건강 전도사’
“야, 이 자식 묻어버려!”
1981년의 일이다. ‘저질탄’ 생산현장에 잠입해 취재를 하던 중이었다. 저질탄이란 석탄에 돌가루를 섞어서 만드는 질 나쁜 연탄으로, 적발되면 벌금 50만 원에 징역형이었다. 취재 사실을 눈치 챈 ‘두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다짜고짜 기자의 멱살을 움켜잡고 버쩍 들어올렸다. 기자는 그가 단순한 위협 차원에서 생매장 운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두목은 법망을 피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치울 기세였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정 예닐곱 명이 한쪽에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기자가 기지를 발휘했다. “경찰 정보과장하고 같이 왔소. 이 아래 소장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소. 그리고 취재한다고 다 기사를 쓰는 것도 아니고….”
두목이 멱살을 풀었다. 기자가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하자, 두목은 차근차근 자기 입장을 밝혔다. 그는 저질탄이 필요한 곳도 있다, 알고 보면 국가에서도 눈감아 주는 일이다, 하는 논리로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천천히 소장실로 걸어 내려왔다. 기자는 소장실에 들어와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소장실 한켠에 놓인 곡괭이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루를 집어들어서 두목의 등을 냅다 후려갈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생매장하려 들어?”
기세등등하던 두목이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상황을 파악한 관리소장도 “현장 관리를 제대로 못해 죄송하다”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 공무원 그만두고 언론에 뛰어든 사연은….
연합통신과 서울신문의 기자로 35년 동안 현장을 누빈 김동진(71) ‘회장’의 경험담이다. 주변에서 그는 ‘회장님’으로 통한다. 큰 사업체나 모임의 장을 맡고 있는 건 아니다. 이승엽이 단골로 드나들면서 조금 유명세를 탄 헬스장과 목욕탕 하나를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기자 시절의 인맥을 바탕으로 워낙 활발한 활동을 펼쳐서 얻은 별명 같은 호칭이다. 기자 시절 그는 ‘동키호테’, ‘김박사’, ‘김박력’ 등으로 불렸다. 대구·경북 지역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수많은 특종을 낚았다. 김 회장은 “그때는 정말 물불 안 가리고 취재를 하러 다녔다”면서 “간혹 위험한 일을 겪기도 했지만 하루하루 신바람 나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목숨에 위협을 받았던 탄
광촌 취재와 관련해서도 1년쯤 뒤 저질탄 기사로 특종상을 받았다.
그는 1976년 모 지방지 기자시험에 합격하면서 언론에 입문했다. 언론에 몸담게 된 계기도 재밌다. 5년차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5급 기술직 공무원을 준비하던 중 진로를 바꿨다. 자신을 횡령 혐의로 덤터기 씌우는 오보 기사 때문이었다. 하도 억울해서 나도 기자 해야겠다 싶었다. 그날부터 당장 기자 시험을 준비했다. 몇달 뒤 자신에게 곤욕을 치르게 한 바로 그 신문사에 3등으로 합격했다. 이후 언론통폐합으로 신문사가 없어지면서 다시 시험을 쳐서 연합통신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9년의 일이었다.
그는 상주, 점촌(문경), 예천, 영주, 봉화 등 ‘기사 거리 적은’ 지역을 담당했다. 6개월 만에 송고 건수와 게재 건수, 게재 단수로 매긴 점수에서 연합통신 전국 기자들 중 3등을 했다. 실질적으로는 1등이나 다름없었다. 발로 뛰며 찾아내 이룬 성과였다.
1987년 서울신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도청을 출입했다. 5층 도청 건물을 하루에 다섯 번 오르내린다는 결심을 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특종상을 여섯 번이나 받았다.
- 호박이 가르쳐준 기자 정신
그런 그에게 고(故) 이의근 경북도지사가 붙여준 별명이 ‘김박’이었다. 별명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아는 것이 많다고 ‘김박사’, 말에 박력이 있다고 ‘김박력’. 김 회장이 한번 목소리를 높이면 도청이 쩌렁쩌렁 울리고 국장들도 바짝 긴장할 정도였다. 그는 펙트에 관한 한 “목숨을 걸었다”고 고백했다.
“한번은 예천 어디에 드럼통처럼 큰 호박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어요. 마을 이름도 정확하지가 않았습니다. 비행장 옆에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뒤편에 있는 마을이라는 식이었습니다.”
3시간 넘게 차를 타고 현장을 찾아갔다. 교회를 찾아 그 뒤에 있는 마을에 들어갔더니 과연 큰 호박이 있었다. 무게가 87kg였다.
“크긴 한데 미심쩍더라고요. 생긴 게 보통 호박처럼 둥글어요. 제보엔 분명 드럼통 같다고 했거든요.”
혹시 뒤에 마을이 더 있느냐고 물었더니 주민이 “그렇다”고 했다. 다시 뒷마을로 갔다. 거기서 ‘드럼통처럼 긴’ 그 호박을 만났다. 자가 없어서 그 마을 학생에게 30cm 자를 빌려 새끼줄 길이를 잰 다음 그 줄로 호박 둘레를 쟀다. 무게는 마을 주민이 근(斤)저울로 잰 무게를 kg으로 환산했다. 둘레가 186cm, 무게가 156kg이었다. 돌아와 당장 기사를 썼다. “자와 저울을 들고 가서 직접 쟀느냐”는 본사 데스크의 물음에 속이 뜨끔했다. 다시 갈 엄두가 나지 않아 “어쨌든 재봤다. 정확하다”고 얼버무렸다.
다음 날 지역 방송에서 그가 이틀 전에 취재한 호박을 영상으로 내보냈다. 리포터가 자와 저울을 들고 와서 직접 재고 있었다. 둘레길이는 185cm. 오차 범위 내에서 정확했다. 다음은 무게였다.
“무게는, 저희가 직접 재보니 136kg입니다.” 밥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그는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20kg나 차이가 났다. 기사로서의 ‘명성’이 한 순간에 무너질 위기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카메라가 호박 뒷부분을 비쳤다.
“인근 주민들이 대형 호박의 씨앗을 얻으려고 밑동을 잘라서 속을 일부 파내는 바람에 무게가 20kg 정도 줄었습니다. 원래 무게는 156kg입니다!”
다음부터 늘 마음속에 ‘자와 저울’을 들고 다녔다. 확인 또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취재가 더욱 꼼꼼해진 것은 물론 정보원을 적극 활용했다. 정보원 인맥이 넓어지면서 다른 기자들이 놓치는 팩트를 ‘건지는’ 일이 자주 있었다.
89년 무렵이었다. 경주에 조직폭력배들이 중간보스가 구속된데 항의해 호송차량을 불태웠다. 그일로 27명이 구속됐다. 다른 신문에는 모두 조폭 27명 구속이라는 주제로 기사가 나갔다. 김 회장만 달랐다. 정보원에게 “법정에서 판사에게 ‘네 가슴엔 철판 깔았냐. 나중에 찔러버리겠다’는 식의 위협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법정소란을 테마로 기사를 송고했다. 법정소란이 조폭 구속보다 훨씬 더 무게 있는 주제였다.
- 30년 동안 모은 돈 다 날리고…
그렇게 잘 나가다가 1995년에 인생의 위기를 맞았다.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상주 시장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한 것이었다. 복직한 지 2년쯤 지났을 무렵 IMF가 터졌다. 부부의 월급으로는 선거 때 진 빚의 이자도 갚기 힘들었다. 부업을 해야겠다 싶었다.
“하루는 달력을 찢어서 할 수 있는 일을 적어봤습니다. 96개의 직업이 나오더군요. 그중에서 현금거래, 5,000원 이하의 박리다매, 퇴직해도 가능한 직종을 추렸습니다. 그랬더니 4개 직종이 나오더군요.”
마침 고향 사람인 국민연금대구지사장으로부터 “국민연금대구지사 건물을 신축했는데, 지하 목욕탕 자리가 세가 안 나간다”는 하소연을 들었다. 목욕탕은 리스트에 올린 4개 업종 중의 하나였다.
현장을 둘러보니 여느 건물과 달리 활용면적이 적은데 세가 비싸 나가지 않은 거였다. 기자 특유의 꼼꼼함으로 A4 용지 26장에 세를 낮춰야 하는 이유를 정리해서 본사에 보고하도록 했다. 결국 승인을 얻어냈다. 대구지사에서도 못 했던 일이었다. ‘역시 김 기자’라는 말이 나왔다. 그렇게 목욕탕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 전국에서 할인대상이 가장 많은 ‘남다른’ 목욕탕
2005년에는 지산동으로 목욕탕을 옮겼다. 그의 목욕탕은 두 가지로 유명하다. 우선, 전국에서 할인대상이 가장 많다. 임산부, 65세 이상 노인, 학생, 군인, 자원봉사자, 장애인, 생활보호대상자, 통장(이장), 새마을지도자, 새마을 부녀회원 등이다. 이중에서 ‘통장’과의 인연은 특별하다. 기자로 재직하던 시절 “수고하는 이장들에게 9급 공무원에 준하는 예우를 해야 한다”는 기사를 자주 써서 결국 이장과 통장들이 활동비를 지급받도록 했다.
무료입욕권도 ‘어마어마하게’ 뿌린다. 매년 명절이나 특별한 절기마다 수성구청 희망나눔복지재단(1,000장), 지산복지관(500장), 지산1동(500장), 인근 경로당 4곳에 200장씩 전달한다.
기부 활동도 하고 있다. 2006년부터 10년째 지산1동과 범물 1동에 거주하는 조손 가정 청소년 6명에게 매달 한번씩 목욕, 이발, 식사를 제공한다. 소정의 용돈을 주고 있다. 현재는 김 회장이 4명을 맡고 있고 나머지 2명은 이발사들과 목욕관리사들이 돌보고 있다. 좋은 활동이지만 정착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정서적으로 예민한 나이라서 전화를 해도 잘 오려고 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1명, 2명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주민센터 직원과 제가 합동작전으로 한번씩 전화를 걸어서 다가가려고 노력했죠.” 아이들 마음의 문부터 열고자 한 것.
“요즘은 친손자 손녀처럼 스스럼이 없어요. 주위에서도 그런 모습을 많이 부러워하죠. 한달에 한번 만나는 아이들이지만 늘 눈앞에 아른 거릴 정도입니다. 그만큼 정이 깊어진 거겠죠. 봉사에 참여하는 직원들도 모두 같은 마음일 겁니다.”
- 운동 중에 최고는 사회활동
2005년 목욕탕을 인수하면서 찜질방 자리에 헬스클럽을 만들었다. 첫해 등록 회원은 30여명, 현재는 1,000명에 이른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5시 반에 출근해서 9시까지 카운터를 지키고 그 후로는 헬스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특히 오후에는 초보 회원들에게 운동법을 지도한다. 특히 “운동을 꾸준히 하도록” 설득한다. 이것도 일종의 ‘봉사활동’이라고 했다.
“2009년 무렵에 심경근색으로 쓰러졌습니다. 다리에 있는 혈관을 빼내 낡은 심장 혈관과 교체하는 대수술이었죠. 구사일생으로 병상에서 일어난 후 건강 관리 지침을 세우려고 30여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운동과 식사, 심장에 관련된 서적이었죠.”
거기에서 세 가지 결론을 얻었다. 첫째는 식사를 제때하고 소식하는 거였고 두 번째는 운동이었다.
“특히 꾸준한 운동이 중요합니다. 일주일에 4번 이상, 1회 1시간 이상, 그리고 등에 땀이 흐를 정도로 해야 합니다. 이 운동법으로 건강을 되찾은 회원들이 많습니다. 저의 가장 중요한 사회 봉사활동이죠.”
목욕탕 관리 외에도 재구상주향우회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 활동을 펼치고 있다. 기자 시절 쌓은 두터운 인맥 덕분이다. 그가 보여준 수첩에는 현직 기자 이상으로 식사 약속과 모임 스케줄이 빼곡했다.
“사람은 닳아서 죽어야지 낡아서 죽으면 안 돼요.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마음에 품은 뜻과 포부를 다 펼치면서 하루하루 신나게 살 겁니다. 내 삶에 충실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세상을 향한 가장 지극한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힘 닿는 데까지 열심히 사회 활동을 해야죠, 하하!”
웃음소리가 30대 청년처럼 우렁차다. 유행가 한 자락이 자연스럽게 뇌리를 스쳤다. ‘30대 같은 70대니, 50년 뒤에나 오라고 전해라~!’
◆ 재구(在邱)상주향우회
김 회장이 사회 활동 중에서 가장 열정을 쏟는 곳은 ‘향우회’다. 향우회가 발족한 것은 1987년이었다. 김 회장이 총대를 메고 대구에 사는 상주 출신 기업인, 기관장을 한 자리에 모아 향우회 발족의 뜻을 전했다. 이후 15년 동안 총무를 자처해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다. 지금의 상주 향우회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현재는 고문을 맡고 있다.
대구에 거주하는 상주 출신 시민은 대략 20만. 그중 등록 회원은 2,300여명이다. 재구상주향우회 아래 학교, 구, 직장 단위 향우회 등이 48개다. 매년 재구상주향우회 총회에 800명 이상이 모인다.
그동안 회원들 간의 친목 도모를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개인적으로 하는 활동이든 향우회원들과 함께하는 일이든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무슨 일을 하든 독립군의 각오로 하자”는 것이다.
“활동을 하려면 일단 (독립운동처럼) 의미부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두가 반대해도 밀어붙이는 힘과 끈기가 거기서 나옵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은 세상이 알아주게 되어 있구요. 독립군 정신 덕에 ‘돈키호테’라는 말도 들었지만 그 덕에 신나게 기자 생활도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저는 우리 향우회가 전국에서 가장 신바람 나게 돌아가는 향우회라고 자부합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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