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성(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학과 강사)
인도 델리에서 1990년대 대부분을 연구자로 활동한 입장에서 최근 10여 년 동안 델리와 주변 신도시들을 조사 방문할 때마다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촘촘하게 연결된 전철망과 새 도로들 덕분에 이동이 간편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거대한 쇼핑몰과 고급 레스토랑 및 카페, 높은 담과 경비원으로 격리된 고급 아파트단지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올드 델리 구주택가에도 판자촌을 정비하고 공원을 단장하며 입구마다 대문을 세우는 등 동네 미화사업이 한창이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집들이 드문드문한 시골에 불과했던 구르가온에는 수십 층 고층빌딩과 쇼핑몰, 아파트단지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과거에는 전통의상이 대세였던 델리대학교 캠퍼스에서는 리바이스 청바지와 아디다스를 걸치고 최신 스마트폰과 자가용으로 무장한 학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91년의 신경제정책 실행 이후 인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모습들을 통해 뚜렷하게 실감할 수 있는데, ‘새로운 소비문화(new consumption culture)’라는 변화를 이끈 주역은 바로 대도시의 젊은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신경제정책으로 인해 수 많은 공기업이 민영화되고 외국기업들의 직접투자가 크게 늘어나 민간부문의 전문직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덕분에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집단이 커졌다. 또 소비재 시장이 개방돼 이전에는 구경하기 힘들던 온갖 해외 브랜드 상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고소득 직종의 대명사 IT 전문가
민간부문의 고소득 전문직 중 대표주자는 뭐니뭐니 해도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ㆍIT)산업 종사자들이며, 그 중에서도 소프트웨어 전문직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다. IT산업은 90년대 이후 인도 경제의 고속성장을 이끈 주요 동력이자,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분야로 각광받아왔다. 인도의 전국 소프트웨어-서비스 기업협회(NASSCOM)에 따르면, IT산업의 총매출은 2015년 1,500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9.5%에 달했고 전 세계 아웃소싱 시장의 55%를 차지했다. IT산업 종사자 숫자도 2005년에 100만 명을 넘어선 후 2015년에는 직접고용 352만 명, 간접고용 1,0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빠르게 증가했다.
IT산업의 성장이 워낙 빠르다 보니 매년 수십만 명을 새로 뽑느라(2015년 신규고용 23만 명) 기업이 원하는 실력을 갖춘 전문인력은 항상 부족했고, 따라서 이들의 연봉이 다른 직종에 비해 더욱 빠른 속도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4년 전 여름 인도 IT 대기업 인포시스(Infosys Technologies)의 소프트웨어 전문직 3년차인 로히뜨(Rohit K. Mishra)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만난 그의 아버지 증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저녁식사 후 시원한 맥주를 곁들여 잡담하는 자리에서 네루대학교 교수로 정년 퇴직을 앞두고 있던 로히뜨의 아버지는 “내가 30년을 교수로 일해서 받는 연봉을 얘는 고작 3년 일하고 받는다”며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아들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는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실제 인도 소프트웨어 전문직은 부모 세대가 평생을 일하고 퇴직 무렵에야 받는 연봉을 신참 시절부터 받을 수 있다. 게다가 당분간 IT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이 확실해서 일자리를 잃을 걱정도 없다. 그러면서 인도에서의 IT산업은 카스트나 종교, 지역이나 계급 등에 따른 차별이나 불평등 없이 누구나 ‘실력(merit)’만 갖추면 성공할 수 있는, 세계화 시대에 인도 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모범 분야로 인식되고 있다.
고소득 전문 직종의 속사정
하지만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 소프트웨어 전문직으로 취업하는 데 성공하는지 그 속사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선 인도 IT 대기업에 지원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소위 일류로 꼽히는 교육기관의 졸업장이 필요하다. IT 대기업들은 전국적으로 수천 개가 넘는 공과대학과 컴퓨터 교육기관 중 자신들이 선별한 50~100개 정도의 우수한 기관들에서만 채용활동을 벌인다. 때문에 이 명단에 속하지 않은 절대다수 대학의 졸업생들은 애초에 지원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 카스트와 종교에 따라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매우 불평등한 인도의 현실을 고려해 본다면, 사실상 IT 대기업 입사 기회는 ‘대도시의 힌두 상층 카스트’ 젊은이들에게만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 정부는 카스트제도로 인해 집단적으로 존재하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독립 이후부터 정원할당정책(Reservation Policies)을 시행했다. 하층 카스트(15%)와 부족민(8%), 중간층 카스트(27%ㆍ1990년부터 시행)를 수혜대상으로 하고 ▦교수ㆍ행정직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 ▦각종 선출직 등 세 분야의 일자리를 각 집단의 인구비율에 따라 할당해 주는 것이 이 정책의 골자다. 덕분에 원칙적으로는 중간층과 하층 카스트 및 부족민 출신도 IT 대기업 명단에 들어있는 일류 국공립대학에 최대 50%까지 입학할 수 있다.
하지만 카스트와 교육의 관련성을 분석한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이들의 졸업률이나 평균 학점, 졸업 후 취업률, 평균 임금 등이 상층카스트 학생들과 비교할 때 크게 뒤떨어진다. 즉 중간층이나 하층카스트 학생들은 정부 지원으로 좋은 대학을 다닐 수 있는 혜택을 받았더라도, 입학 전에 이미 벌어져 있던 상층카스트 학생들과의 학력 격차를 좁히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설령 입사 지원서류를 제출하더라도 서류심사 단계에서 대부분 탈락하게 된다. 중간층이나 하층카스트 출신을 걸러내는 메커니즘은 서류 심사를 통과한 후 이뤄지는 집단ㆍ개별 면접 단계에서 특히 심각하다. IT 대기업을 비롯한 민간기업 인사담당자들을 조사한 연구들에 따르면 면접관들이 지원자들의 실력과 더불어 가장 중요하게 꼽는 요소는 바로 ‘가정환경(family background)’이다. 부모의 직업과 교육 정도, 사는 곳과 친척 관계를 비롯한 사회 연계망, 형제ㆍ자매의 교육 정도와 직업, 식습관을 포함한 전반적인 예절(manner) 등 직업 능력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사항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물어본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ㆍ문화 자본(social-cultural capital)에 대한 평가가 당락을 결정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인도 IT산업은 주로 선진국의 주문과 하청을 받아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납품하는 서비스업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에 직원들이 미국이나 유럽의 고객들과 현지파견, 전화, 화상회의, 이메일 등을 통해 자주 소통해야 하고, 따라서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사회-문화자본을 갖추는 것이 필수라는 게 IT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의 해명이다. 세계 시장에서 소프트웨어 하청서비스를 주로 제공하는 인도 IT산업의 기본적인 성격으로부터 소프트웨어 전문직의 채용기준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카스트는 ‘기울어진 운동장’ 의 ‘넘사벽’
결국 인도 사회에는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와 마찬가지로 사회-문화자본을 갖출 수 있는 기회 자체도 카스트와 종교에 따라 매우 불평등하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2005-2006년에 걸쳐 약 550개 민간기업에 4,800여 통의 입사지원서를 보내 통신 조사를 실시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우수한 스펙으로 꾸민 같은 내용의 지원서를 3통씩 작성한 후 힌두 상층카스트, 하층카스트, 무슬림임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지원자의 이름만 각기 다르게 적었다. 서류 심사를 통과한 450통을 분석한 결과 힌두 상층카스트를 100으로 잡을 때 하층카스트는 67, 무슬림은 35에 불과했다. 다른 모든 조건이 똑같더라도 단순히 이름에서 드러나는 소속 카스트와 종교만으로도 이미 뚜렷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경제정책 이후 소프트웨어 전문직으로 대표되는 알짜배기 일자리를 제한된 소수만이 차지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예를 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원할당정책을 통한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양극화가 여전히 카스트와 종교라는 틀을 통해서, 즉 개인의 실력보다는 출생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사실이 ‘인도식 세계화’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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