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아 100명 중 1~3명은 선천성 기형 또는 유전성 질환을 안고 태어난다. 유전성 질환은 말 그대로 유전, 또는 유전자 일부 인자의 돌연변이로 발병한다. 그 병들은 1953년 제임스 왓슨 등이 DNA 분자구조를 밝히기 전까지 ‘선천성 대사이상 질환’이란 애매한 이름으로 불렸고, 더 오래 전에는 저주의 다른 표현인 ‘천형(天刑)’이라 불리기도 했다. 인류가 유전성 질환의 발병 메커니즘을 밝혀 공략의 가능성을 찾아 나선 것도 사실상 1960년대 이후부터였다.
혈우병(Hemophilia)은 대표적 유전병 가운데 하나다. X염색체 혈액응고인자 가운데 일부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어 출혈시 피가 잘 멎지 않는 질병.(X염색체 질환이라 여성 환자는 드물다. 여성(XX)은 한쪽 X에 문제가 있어도 다른 쪽으로 만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혈우병 환자는 보인자인 어머니와 환자 아버지 사이에서 25%의 확률로, 환자 부모 사이에서 50% 확률로 태어나며, 사산될 경우도 많다.) 정상인의 경우 피가 나면 혈관이 수축돼 출혈량이 줄고 혈액 속 혈소판이 상처의 구멍을 메운다. 그 사이 체내에서는 혈액단백질 등이 응고괴(clot)라는 물질을 형성해 그물처럼 상처 부위를 막아 혈소판의 기능을 돕는다. 혈액응고인자가 부족하거나 없으면 저 기능이 약해진다. 외상도 위험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출혈, 예컨대 경미한 뇌출혈이나 장출혈도 혈우병 환자에게는 치명적이다. 환자는 혈액에서 추출한 응고인자 농축제제나 유전자재조합제제(단일클론항체)를 주기적으로 정맥에 주사해 불시 출혈에 대비하거나 증상을 완화해야 한다.
미국 스탠퍼드 의대 종양학자 홀브룩 코흐트(Holbrook Kohrt)가 앓던 병이 혈우병이었다.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턴 시에서 1977년 12월 14일 태어났다. 몸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멍이 많았고, 할례(포경수술) 후 출혈이 멎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경우는 가족력 없이 발병한 돌연변이성(전체 환자의 20~30%)이었고, 소아과의사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조차 처음엔 혈우병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던 사이, 심한 멍을 보고 아동학대를 의심한 누군가의 신고로 아동보호국(CPS)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진단 결과 코흐트는 8번 응고인자 결핍, 즉 ‘A형 혈우병’이었다.(환자의 약 60~70%가 A형이다.)
가족력 없이 발병한 혈우병
온몸에 멍들고 할례 후 지혈 안 돼
병원 전전하며 원인 찾아내
의료인 부모 덕에 정상생활 가능
훗날 그는 이런저런 자리에서, 산 날들을 ‘행운 덕’이라고 말하곤 했다. 행운이라면 좋은 부모를 만난 게 첫 번째 행운이었을 것이다. 충격이 컸을 부모가 맨 먼저 한 일은 그의 침대와 방 바닥ㆍ벽을 푹신한 패드로 감싸는 거였고,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헬맷 등 안전 장구를 쓰게 했다. 병을 가급적 의식하지 않고 최대한 평범하게, 다른 아이들처럼 놀고 활동할 수 있게 하자는 배려였다. 의료인 부모였으니 그들은 영국혈우재단이 발간한 ‘혈우병과 더불어 살기 Living with Hemophilia’의 어린이 지침을 읽었을 것이다. 지침 10개 항목 대부분은 “정상적으로 친구와 놀”고 “정상적으로 학교 생활을 하”고 “정상 수명을 기대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코흐트는 무조건 이틀에 한 번씩 혈액제재 정맥주사를 맞아야 했고, 병원 응급실을 제 집처럼 드나들어야 했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 아이가 직접 주사를 놓는 장면을 본 담임 교사가 졸도를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더 고통스러운 건 편견이었다. 수혈을 받으면 지옥에 간다고 믿던 ‘여호와의 증인’신자 이웃들의 폭력이 특히 심했다고 했다. 2014년 샌프란시스코 매거진에 쓴 글에서 그는 “3살 때부터 8살 때까지 그들(여호와의 증인 신자 이웃)은 실제로 내 가족을 위협하기도 했다”고 썼다. 대문 앞에 서있다가 문을 열고 나서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고, 버스 같은 데서 조롱을 하기도 했다. 그는 “생존에 필요한 처방을 받는 사람을 향한, 그토록 지독한 편견과 비이성적이고도 집요한 적의를 그 뒤로 경험한 적이 없다”고 썼다.
80년대 중ㆍ후반 에이즈 재앙
당시엔 혈액제제가 유일한 대안
HIV 감염위험에 그대로 노출돼
혈우병 캠프 200명 중 2명만 생존
학교에 입학한 8살 때부터, 부모는 그를 혈우아동 여름캠프에 보냈다. 전문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안전한 시설에서 같은 처지 아이들끼리 어울려 지내는 프로그램. 툭하면 붓는 무릎 관절, 멍 투성이 팔다리들을 서로 내보이며 키득거리기도 하고 지긋지긋한 정맥 주사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그들은 학교 친구들과는 또 다른 우정을 쌓았을 것이다. 그 무렵 80년대 중ㆍ후반은 AIDS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였다. 당시 혈우병 환자에겐 혈액제제 외에는 대안이 없었고, 불특정 다수의 혈액에서 추출한 응고인자 농축액들은 HIV 바이러스에 무방비 상태였다. 그는 첫 캠프 때 약 200명이었던 참가자가 해가 바뀔 때마다 줄어갔다고 했다. “이듬해 만나면 우리는 누가 안 왔는지, 그는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서로 묻곤 했고, 점점 그 질문은 누가 죽었는지로 바뀌어갔다.” 그들 다수는 혈우병 때문이 아니라 AIDS로 숨졌고, 10대 중반 캠프가 문을 닫을 무렵까지 살아남은 이는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다.(NYT, 2013.12.23)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코흐트와 같은 생존자를 대상으로 HIV 내성인자 보유 여부를 검사, 그 중 일부가 실제로 돌연변이를 통해 HIV 면역에 기여하는 케모카인(Chemokines) 단백질과 수용체를 보유한 것으로 훗날 밝혀냈다. 코흐트는 그런 변이 없이 감염되지 않은, 기적 같은 행운의 주인공이었다. 13살 때 감염 혈액제제 때문에 C형 간염에 걸려 약 2개월간 입원하기도 했는데, 그 때는 ‘완전항체반응(full antibody response)’즉 몸 면역시스템이 스스로 병을 치유해내는 또 한번의 마법 같은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 혈액제제가 안전해지고, 유전자재조합 방식의 새로운 치료제, 즉 비감염 혈액의 특정 단백질을 햄스터의 난소 등에 주입해 혈액응고인자를 생산 추출해 만드는 농축제제가 나온 것은 90년대 이후였다. 코흐트는 ‘행운’이라고 했지만, 그건 사무치게 원망스러웠을 자신의 몸을, 그래도 믿고 사랑한다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코흐트는 2013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유년 시절 대면하는 죽음은 그 무게를 온전히 느끼는 죽음은 아니다. 어찌어찌 살아지겠지(life goes on), 하고 여기게 된다”고 말했다. 성년이 된 뒤 다른 자리에서는 “생명과 직결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건 고도의 공포를 동반한 채 산다는 걸 의미한다. 그 공포를 안고 반복된 일상을 다만 버틸 것인가, 어떤 희망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의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흐트는 펜실베이니아 뮬런버그(Muhlenberg) 칼리지에서 분자생물학을 전공한 뒤 2000년 스탠퍼드 의대에 진학해 석ㆍ박사 과정을 이수해 조교수가 됐고, 2012년부터 대학 부설 ‘레비(Levy) 연구소’에서 면역 종양학 연구에 몰두했다.
레비 연구소의 로널드 레비(Ronald Levy, 1941~)는 로슈 사의 블록버스터 표적항암제 ‘맙테라’의 주성분인 단일클론항체 ‘리툭시맙(Rituximabㆍ리툭산)’의 개발자로 유명하다. 단일클론항체란 표적 항원에만 부착돼 항암 화학치료 시 건강한 세포에 독성을 줄여주는 특이 항체로, 리툭시맙은 “악성 B세포에 발현된 CD20 항원을 표적으로 하여 체내 면역체계가 표지된 B세포를 공격하게”(서울대 암정보교육센터)하는 기능을 한다. CD20 항원은 줄기세포에는 없기 때문에 화학치료 부작용을 줄여주고, 치료 후 건강한 B세포가 재생되는 데 도움을 준다. 리툭시맙은 비호지킨성 림프종과 백혈병, 류마티스 관절염 등에 주로 쓰인다.
의사 겸 종양학자가 된 동기를 그는, 샌프란시스코 매거진에 이렇게 썼다. “힘든 시기마다 곁에 의사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나를 절망하지 않도록 도와준 이들도 의사였다.(…) 나도 다른 이들의 삶에 그런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었다.” 그는 “C형 간염 극복 경험 등을 통해 암도 면역체계를 활성화하는 방법으로 공략할 수 있지 않을까 관심이 쏠렸다”고 말했다.
스탠퍼드 의대서 종양학 연구
C형간염 극복 경험 토대로
면역체계 활성화 방법 연구
유방ㆍ난소암 독자치료법 개발
그의 주 연구분야도 ‘항체공학(antibody engineering)’을 통한 면역시스템 개선이었다. 그는 2013년 8월 스탠퍼드 의대 ‘항체공학 및 치료’ 팟캐스트에 출연 “리툭시맙 이래로 트라스투즈맙(유방암 표적치료제), 세툭시맙(직장결장암ㆍ두경부암 표적치료제) 등 다양한 단일클론항체들이 개발됐지만, 불행히도 우리가 기대했던 ‘특효약(magic bullet)’이 되진 못했다”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의과학자들이 안간힘 다하는 분야의 하나로 항체공학을 소개했다. 국내 여러 항체공학연구소 등에 따르면 항체 공학은 치료용 항체 반복 투여 부작용 제어, 면역 항체반응을 최소화하기 위한 생쥐 단일클론항체의 인간화 항체(humanized antibody) 전환, 치료 효능을 높이기 위한 이중특이항체(bispecific antibodyㆍ일종의 면역항암 병용요법) 실험, 항체-약물 결합체(ADCㆍantibody-drug conjugate) 등을 연구ㆍ개발하는 분야다.
코흐트는 자궁경부암과 난소암 수술 환자에게 미량의 암특이단백질(cancer-specific protein)을 백신처럼 투입, 잔존 암세포를 공격하고 고형종양의 재발을 방지하는 치료법을 독자적으로 개발, 쥐 실험치료에 성공한 뒤 임상실험을 진행해왔다.(Stanford.edu, 2016.3.1) 쿠바 의료진의 요청으로 현지에서 유방ㆍ난소암 백신 1차 임상실험을 진행해 성공했고, 그 실험은 현재 호주와 유럽, 스탠퍼드대에서 진행되고 있다.
앞서 그가 스탠퍼드 의대의 ‘Advanced Residency Training(ART)’을 이수한 까닭도 연구와 임상치료를 병행하기 위해서였다. ART는 미국서 의대(의전원)을 졸업하면 받는 MD(Medical Doctor) 외에 의과학 연구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PhD를 결합한 교육프로그램.(통합과정으로 운영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MD만 보유한 의사가 많아 ‘MD=의사’라는 의미로 주로 통한다.) 그는 2009년 스탠퍼드 의대 매거진 인터뷰에서 “임상에서는 판단과 결정을 신속히 해야 하고 결과의 옳고 그름도 금방 드러나지만, 실험실에서는 그 과정에 예사 몇 달 심지어 몇 년씩 예사로 걸린다.(…) 두 가지 상반된 일을 함께 잘 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렵지만(…) 나로선 환자에게서 얻는 (즉각적인) 만족 없이는 (길고 지루한) 일련의 실험들을 잘 해내지 못할 것 같더라”고 말했다. “효과적인 치료법을 가지지 못한 채 암 환자를 대하는 건 참 힘든 일이다. 그럴 때마다 조금이라도 빨리 실험실로 돌아가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만큼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환자들의 심정을 잘 알았을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만큼 내 모든 걸 과학과 환자들에게 쏟아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만일 당신이 어려서부터 심각한 질병을 앓아왔다면, 아마 당신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그는 “그건 인간관계에서는 썩 좋은 일이 아니어서 나는 결혼을 두 번 했다”고 덧붙였다.(NYT,2013.12.23)
그는 2월 22일 바하마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뇌출혈을 일으켜 마이애미의 잭슨 메모리얼 병원으로 후송됐고, 이틀 뒤인 24일 별세했다. 향년 38세.
근년 들어 그의 육체는 응고인자제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체 면역체계가 농축제제를 항원으로 인식해 공격에 나선 거였다. 항체 반응은 대개 초기에 발현하지만, 그의 경우처럼 드물게 늦게 나타나기도 한다. 스탠퍼드 의대 종양학과장 조지 슬레지 주니어(George Sledge Jr)는 “그는 재능과 헌신, 끈기 면에서 예외적으로 탁월한 동료로 존경 받았다”며 “수많은 선배 연구자들도 그를 통해 많이 배웠다며 슬픔을 전해 왔다”고 전했다. 가장 가까운 스승이었을 레비는 “항암 면역요법 분야에서 그는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발견을 해냈고, 환자에게 직접 혜택을 줄 수 있는 여러 임상 실험을 디자인해 추진해왔다”고 말했다.( med.stanford.edu, 20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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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혈우재단이 지난해 5월 발간한 ‘2014혈우병백서’에 따르면 한국의 혈우병 등록환자는 2014년 말 기준 2,255명(여성 141명)이다. 한국의 경우 남자 신생아 5,000명 당 1명 꼴로 혈우병을 안고 태어나지만, 등록 환자가 적은 까닭은 등록을 않거나 병 진단 전에 숨지는 경우가 많아서다. 65세 이상 환자는 60명이다.
세계혈우연맹(WFH)이 정한 ‘세계 혈우인의 날’이던 지난 해 4월 17일 혈우병환자단체(코헴회) 전 사무국장 김태일씨는 한국의 혈우병 환자들이 외국에서 개발된 신약들을 즉시에 제공받지 못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본보에 기고했다. 1991년 당시 보건사회부는 국내 혈우병환자 등록ㆍ관리 업무를 1990년 설립된 한국혈우재단(혈우병 치료제 생산업체인 녹십자 지원금으로 설립ㆍ운영)에 위탁했고, 이후 재단 판단에 따라 해외의 신약들이 재단 부설병원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잦다는 거였다. 그는 “아무리 진보된 치료법이 개발되더라도 특정한 힘에 의해, 기득권에 의해 높고 높은 장벽에 막혀버린다면 얼마나 많은 희귀 질환자들이 더 고통 받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이 낭비될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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