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사노 요코 지음ㆍ서혜영 옮김
을유문화사 발행ㆍ364쪽ㆍ1만3,800원
전작에서 “남들과 잘 지내는 것보다 자기와 잘 지내기가 더 어렵다”고 단언하던 태도부터 마음에 들었다. 글줄 깨나 읽었다는 먹물들의 ‘자뻑성’ 멘트 ‘시대와의 불화’따위가 아니라, 깔끔하게 ‘자기와의 불화’를 고백하는 말이니까. 남의 불행을 눈 앞에 두고 “문득 떠오르는 것은 이타심, 차차 떠오르는 것은 이기심. 이타심은 없는 것보다 있는 편이 좋다. 그러나 이타심 만으로는 불편하다”는 정도의 문장을 써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런 말들은 멋져 보이려고 지어낸다고 나오는 문장들이 아니니까.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을유문화사)는 동화작가 사노 요코가 40대에 쓴 소소한 생활 에세이다. ‘사는 게 뭐라고’ㆍ‘죽는 게 뭐라고’(마음산책)에 이어 국내에 소개됐지만, 두 책은 말년 암투병 때 써낸 책이니 이 책이 시간적으론 앞선 셈이다.
이 할머니, 아니 아줌마의 수다는 기묘한 끌어당김이 있다. 2차대전 때 혈육을 잃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한 사노에게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이런 거다. “그건, 비가 내리는 16킬로미터의 거리를 무거운 남자용 자전거에 세일러복 스커트를 펼쳐 올라타고 흠잡을 게 하나 가득인 내 얼굴을 비에 흠뻑 적시면서 숨을 헐떡거리며 달리는 거다.” 흔히 예상했던 ‘동화’작가치곤 좀 빈약해 보이는 단어들의 조합인 것 같은 데, 괜히 읽는 나까지 숨이 헐떡인다.
어째 운이 닿아 독일 유학을 했지만 “디자인과를 졸업했으면서도 직각을 제대로 못 그리는” 바람에 작가로 돌아선다. 남편이 세계적 하드보일드 작가 더쉴 해미트임에도 그에 못지 않은 작품 활동을 했던 부인 릴리언 헬먼을 부러워하다가 “기가 세고 재능 있고 못 생기고 자기 주장이 지나치게 강한 여자는 이렇게 훌륭한 거군”이라 토로한다.
잘 생긴 남자를 포기하진 않지만 옷차림은 늘 청바지다. “스커트라도 입으면 혹시라도 내가 남자를 꾀려고 도발적인 차림새를 한 거라고 오해들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불안해진다. 게다가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돌아다녔는데도 아무 사건도 만들지 못한 채 돌아오면 화가 난다.” 그래서 또 다시 입는 게 청바지다.
그렇다고 딱히 좋은 집안의 귀한 여자가 부러운 것도 아니다. 고위 공무원의 부인이 펴낸 ‘나의 서양풍 요리’를 읽다가 “요리 순서 사이에 훌륭하게 묘사된 소위 상류사회 사정의 모습”을 들여다보고선 “표현이 곧 자만이 되는 사람”이라며 증오한다. 물론 균형감각도 잃지 않는다. “그들은 나의 이 표현을 보고 사실의 왜곡이라고 할 것이다.”
킥킥대며 읽다 보면 사노 표현대로 “그래 이게 범인(凡人)이다” 싶다. 사노는 이 책에서 이미 죽을 때 “종잇 조각, 팬티 하나 남기지 않고 슈욱 하고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면 좋겠다”고 썼다. ‘사는 게 뭐라고’ㆍ’죽는 게 뭐라고’를 이미 40대에 예고해둔 셈이다. 자기와의 불화를 고백할 줄 아는 자의 미덕은 역시 단단히 중심 잡힌 자의 자세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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