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서 온 요리사, 서울 사는 요리사
프랑스, 부르타뉴. 남자의 집에는 맛있는 음식이 넘쳐 흘렀다. 할머니와 부모님은 언제나 맛있는 요리를 하는 데 열 올리는 사람들이었고, 남자는 만찬과 파티를 먹으며 자라났다. 그런 성장 배경을 지닌 프랑스 남자들이 흔히 그러듯, 요리를 처음 배운 것은 14세 때였다. 진학도 당연히 호텔학교를 선택해 요리를 전공했다. 남자는 지금까지 30년 넘도록 요리를 했다.
남자의 이름은 얀 레네(Yann Laine)다. 그가 열었던 첫 가게는 의외로 피자 가게였지만 10여 년 동안 프랑스 다양한 지역의 레스토랑들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는 동안 더 다양한 맛을 알게 되었고 미식가이자 요리사로서 자신을 완성할 수 있었다. 20년 전 그는 파리의 한 레스토랑에 취업하며 그의 현재를 결정지을 가문을 만난다. 로스탱 가문이다. 수장인 미셸 로스탱(Michel Rostang)은 1980년대 이래로 파리 미식계의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요리사다. 미쉐린 가이드 투스타를 여전히 유지하는 그의 레스토랑 비즈니스는 두 딸 캐롤린, 소피까지 가세해 총 다섯 개의 레스토랑과 비스트로, 카페 등으로 확장됐다. 얀 레네 셰프는 미셸 로스탱의 '오른팔'로 불린다. 얀 레네는 미쉐린 가이드가 별을 달아준 메종 로스탱뿐 아니라 다른 네 개의 레스토랑까지 모두 관장하는 총괄 셰프다.
또 다른 남자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미식 유전자는 ‘엄마 음식’ 내력인 동시에 해병대의 훈장이기도 하다. 부대 지휘관이 그의 실력을 먼저 알아보고 취사병으로 임명한 것이 요리사 인생 출발점이었다. 제대 후 뉴욕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서양 요리를 배운 후 뉴욕과 스페인 등 미식 기행을 하며 셀 수 없는 레스토랑에서 먹거나, 아예 자리를 틀고 견습 생활을 거치기도 했다. 2009년 2월 서울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 '정식당'을 냈다. 그의 이름이 '임정식'이다.
'뉴 코리안'을 모토로 하는 정식당은 공기를 바꿔놨다. 정식당을 출발지로 '모던 코리안'이라는 조류가 시작되었다. 정식당의 등장 이후 한식은 더 이상 한식 그 자체가 아니었으며, 서양 음식에 억지로 끼워 맞춰진 부자연스러운 장식도 아니게 되었다. 기세를 이어 2011년 뉴욕에 낸 레스토랑 '정식'은 2013년엔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을 받았다. 2016년 미쉐린 가이드 뉴욕판에도 여전히 정식의 별이 빛나고 있다. 두 개다. 올해 말 발표될 서울판에서도 그의 별을 당연시하는 사람이 다수다.
서울을 찾아온 프랑스의 맛
3월 23일 낮, 파리와 서울의 낯선 두 남자는 서울 청담동 정식당에 함께 앉아 있었다. 얀 레네 셰프와 임정식 셰프의 만남을 성사시킨 것은 '소 프렌치 델리스(So French Delices)’였다. 한국과 프랑스가 수교한 지 130주년이 됐다. '한국 내 프랑스의 해' 행사 시작으로 포문을 연 것이 소 프렌치 델리스다. 요리사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한 프랑스 거장 셰프들의 마스터클래스가 열리는가 하면 광화문 거리에서 프랑스 음식의 정수를 길거리 음식으로 알기 쉽게 변형해 소개하기도 한다. 또한 '포 핸즈(4Hands)' 프로그램도 서울 곳곳 레스토랑에서 펼쳐진다. 양국의 셰프가 짝을 이뤄 하나의 코스를 내는 컬래버레이션이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유형의 미식 이벤트다. 정식당 외에도 신라호텔 콘티넨탈, 밍글스, 스와니예, 류니끄, 품, 콩두 등 레스토랑이 24일부터 26일까지 일제히 디너 서비스로 포 핸즈 코스를 준비한다.
갓 프랑스에서 날아온 얀 레네 셰프는 짐을 풀자마자 한식 레스토랑 '콩두'에서 한국의 맛을 경험했다. 입국 둘째날이었던 23일은 새벽부터 노량진수산시장에 들러 정식당 주방에 당도했다. 축축해 보이는 '까만 봉다리'를 양손에 가득 들었는데, 그 중 하나엔 꼬막이 달그락거렸다. 포 핸즈의 기치는 '현지 식재료로 프랑스적인 요리를 해낸다'는 것. 낯선 한국의 식재료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인터뷰를 전후로 얀 레네 셰프는 주방에만 매달렸다.
한국과 프랑스 음식의 맛있는 화학작용
백반 한 끼니가 7000원 선, 어쩌다 하는 삼겹살 외식도 2만원이 넘지 않는 게 평균적인 식생활 비용이다. 그들의 컬래버레이션은 단지 사흘 밤의 꿈. 식당의 크기에 따라 그 꿈을 꿀 수 있는 인원조차 한정돼 있다. 그런데 이 두 남자가 모여 비싸고 아름다운 코스를 내는 것이 우리의 백반 한 상과 무슨 상관일까?
이 컬래버레이션의 의미는 좀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중국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면한 인천항에선 짜장면이 탄생했다. 짜장면의 기원은 중국의 작장면(炸醬麵)라고 알려져 있다. 중국의 어느 창의적인 요리사가 중국 된장에 다진 고기와 면을 비벼 볶아 내며 시작됐을 것이다. 전쟁 후 주한미군이 가져온 구호물자로부터는 부대찌개가 탄생했다. 통조림 햄의 시작은 유럽의 육가공품, 프랑스에서는 샤퀴트리라 부르는 것으로부터였다.
너의 음식은 나의 음식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음식은 바다와 국경으로 떨어져있을지언정, 모두 통해 있다. 통해 있으니까 만났을 때 더 맛나진다. 모두 다 달라보이는 음식 문화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새로운 음식이, 그리고 문화가 비롯된다. 또한 그것을 주도하는 것은 얀 레네나 임정식 셰프 같은 파인 다이닝 셰프들로부터다. 항상 새로운 맛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적 습관이기에 그렇다.
파인 다이닝을 밥 먹듯 즐길 수 없는 우리가 퇴근 길 마음 먹고 마트에서 사오는 와인 한 병, 그리고 마감 세일에서 집어온 소고기 스테이크 한 점조차 프랑스의 레스토랑에서 왔다. '스테이크 잘 굽는 법'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조리법은 대개 프랑스 음식 교과서에 적혀진 정교하고 과학적인 조리법을 실생활적으로 차 떼고 포 떼내 간소화한 조리법이다. 그렇기에 이 두 남자의 만남은 머나먼 평행우주에서 일어나는 남의 일이 아니다. 문명은 발전을 거듭한다. 우리는 그렇게 진화해왔고, 그렇게 먹어왔다. 한국 식문화와 프랑스 식문화가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우리가 이 장면을 한 번쯤 봐둘 만한 이유다.
다음은 두 셰프와의 일문일답.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 내 프랑스의 해' 행사 첫 이벤트로 소 프렌치 델리스가 열렸다. 음식으로 포문을 열었는데 어떤 의의가 있나.
얀 레네= “프랑스에 있어 음식 문화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중 하나다. 한국에서 역시 음식 문화가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두 국가뿐 아니라 어느 국가에 있어서도 음식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중요한 문화 중 하나다. 그렇기에 첫 이벤트로 소 프렌치 델리스가 선택되지 않았나 한다.”
- 임정식 셰프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 뉴욕에서 요리를 배우고 한국 음식을 하고 있다. 식문화에 있어 프랑스의 영향을 어떻게 보나?
임정식= “프랑스 식문화가 주방의 모든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리사가 입는 하얀 유니폼부터 현대화된 주방의 모습까지 모두 프랑스로부터 시작된 체계다. 프랑스 식문화는 근대화된 식문화의 시초다. 요리 학교에서 배우는 가장 기본적인 소스들 역시 프랑스로부터 시작됐다.”
-쉽지 않은 소 프렌치 델리스 작업을 받아들인 이유는?
임정식= "소 프렌치 델리스는 프랑스 음식이 동시대에 해나가는 하나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참가한다는 것만으로 의의가 깊다. 또한 다른 요리사를 만남으로서 새로운 영감을 받고 그 동안 각자가 쌓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
-얀 레네 셰프는 체류 일정이 빡빡하다. 한국에 도착한 후 채 24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어떤 경험들을 했나?
얀 레네=”도착한 날 밤에 초청된 프랑스 셰프들이 모여 식사를 했다. 한국 전통 음식을 먹으면서 동시에 요리에 들어간 한국의 고추장 등 다양한 장을 비교해 테이스팅해 볼 수 있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맛이었고, 흥미로웠다. 몇 가지 장을 선물 받았는데 파리에 돌아가면 요리에 접목해볼 생각이다. 오늘(23일) 새벽엔 노량진수산시장을 둘러봤다. 전 세계를 여행하며 시장을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게 다양한 수산물을 한 자리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일하는 메종 로스탱이 2008년 두바이에도 레스토랑을 냈는데 당시 두바이에서 느낀 것과 한국의 식문화는 아주 다른 인상을 남긴다. 두바이는 전통보다는 모든 게 새로이 수입되어 만들어지고 있는 신도시다. 한국에서는 전통의 깊이를 면면마다 느낄 수 있었다.”
- 프랑스 음식과 한국 음식을 하나의 코스 요리로 어떻게 풀어냈나?
임정식=”우리가 정한 방향성은 서로의 개성을 교차해 보여주는 방식이다. 각자의 개성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요리들을 내세운다. 단지 코스 요리로서 완결성을 기하기 위해 겹치지 않는 재료를 선택했다. 거기서 오는 대비가 재미있을 거다. 얀 레네 셰프의 짙은 푸아그라 요리 다음에 내 가벼운 성게비빔밥이 이어지는 식이다.”
- 프랑스 음식은 이미 오래 전 완성되어 다른 음식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들이며 진화해가는 중이다. 한식은 프랑스 음식에 어떤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나?
얀 레네= "전 세계적인 식문화 취향이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리는 가벼운 쪽으로 기우는 과정에 있다. 버터와 크림으로 만든 무거운 소스 대신 채소를 즙낸 가벼운 소스가 인기 있다. 동시에 아시아의 에스닉 푸드도 조명 받고 있다. 한식 또한 그 중 하나로 영향을 주리라 본다."
- 프랑스에서 특별히 가져온 재료가 있나?
얀 레네= "취지가 현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인 만큼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심지어 주방 스태프조차 데려오지 않고 혼자 왔다. 식재료가 다른 만큼 다양한 시도를 해봐야 하는데 임 셰프가 주방과 스태프를 기꺼이 내어주어 전혀 힘들지 않게 준비했다."
임정식= "한국에도 수입 식재료가 다양하지만 프랑스 현지에서 가져온 재료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있었는데 통관 문제로 쉽지 않아 아쉽다."
- 이 컬래버레이션이 어떤 의미를 남기리라 보나?
임정식= "이런 기회 자체가 특별하다. 얀 레네 셰프와 내가 한 주방에서 코스를 낼 일이 다시 있을까? 그리고 두 요리를 한 코스로 먹을 기회가 쉽게 올까? 소 프렌치 델리스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정말 쉽지 않은 자리를 만들어줬다고 본다. 내게 있어서도 상반된 식당의 주방을 간접 경험해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
얀 레네= "밖으로 나가지 않는 요리사에게는 발전이 없다고 본다. 요리사가 많은 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식문화를 경험해 봐야 식문화 간의 교류를 활성화시키고 새로운 식문화를 만들어내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소 프렌치 델리스 자체가 영감의 원천이다."
- 시간이 허락한다면 얀 레네에게 맛 보여주고 싶은 한국 식문화는?
임정식=”’벽제갈비’가 좋을 것 같다. 손님이 직접 고기를 구워 먹는 '코리안 비비큐' 문화는 다른 나라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도 행위 자체가 재미있지 않나. 분명 얀 셰프도 반할 것이다."
얀 레네= "꼭 가봤으면 한다."
이해림 푸드라이터 herimthefoodwri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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