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패소 노이로제 걸렸나… 무뎌진 칼날
이디야ㆍ골프존 등 무혐의 이어
이마트ㆍ홈플러스ㆍ롯데마트 담합도
심의절차 종료… 사실상 무혐의 처리
과징금 부과 잇달아 뒤집어지자
“엄격해진 기준 따를 수밖에” 해명
“보다 정밀한 조사 않고 눈치만”
안팎서 감시자 역할에 우려 목소리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기업간 담합행위 등 주요 불공정행위 사건에 잇달아 무혐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과징금 사건이 법원에서 패소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사건을 예전보다 깐깐하게 보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시장 감시라는 경제검찰로서의 공정위 역할이 위축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공정위는 23일 이마트와 홈플러스, 롯데마트의 부당공동행위(담합) 혐의에 대해 전원회의를 열고 심의절차 종료로 사건을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사실관계가 확인이 안 돼 법 위반 여부를 판단할 수 없을 때 내려지는 게 심의절차 종료인데, 사실상 무혐의 처분이다. 공정위 사무처는 이들 3사가 2013년 조미료, 통조림 설 명절 선물세트를 판매하면서 CJ제일제당 등 납품업체를 통해 가격을 담합했다는 내용으로 전원회의에 사건을 넘겼지만 전원회의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정위는 지난 1월에도 이디야의 가맹사업법 위반 사건을 무혐의로 결론 내렸다. 본사가 판매장려금을 받는 대가로 매일유업 측이 가맹점에 공급하는 우유 가격 인상을 허용, 가업업자들에게 불이익을 줬다는 혐의였지만 ‘증거가 없다’고 봤다. 작년 12월에는 골프존이 다른 판매업자와 짜고 스크린 골프 시스템 가격의 상한선을 부당하게 정했다는 사건을 같은 이유로 무혐의 처리했다. 11월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 유동성 위기 당시 계열사끼리 기업어음(CP)을 거래해 부도를 막은 부당지원 행위 사건에 대한 사무처의 과징금 의견이 전원회의에서 무혐의로 뒤집히기도 했다.
공정위는 법원의 엄격해진 판단 기준을 이유로 들고 있다. 농심 등의 라면 가격 담합에 대해 지난해 12월과 1월 대법원이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서 공정위 패소 취지로 파기환송한 것이 대표적이다. 공정위 한 고위 관계자는 “법원이 요즘 형사사건에 준할 정도의 확실한 증거 여부에 따라 공정위 사건을 판단하고 있다”며 “공정위가 사실상 1심 역할을 하는데, 법원의 판례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과징금 등 제재 결정을 했다가 이후 법원에서 뒤집히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도 공정위로서는 큰 부담이다.
그러나 공정위 안팎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전직 공정위 고위 관료는 “공정위가 공정위만의 기준에 따라 사건을 적극적으로 처리하면 되는데 법원에서 몇 번 패소했다고 겁을 먹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쓴소리를 했다. 기업들의 불공정 행위는 갈수록 치밀해지고 있는데, 공정위가 법원의 눈치를 보고 ‘자기검열’을 하면서 이를 제대로 잡아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시장에서는 아직 기업담합 등 불공정행위가 만연해 있다”며 “공정위가 적극적으로 감시자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법원이 엄격한 증거를 요구한다면 공정위로서는 지금보다 정밀하고 강도 높은 조사를 통해 이를 풀어나가야 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세종=남상욱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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