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시인 소개:
김용택은 1948년 전북 임실군에서 출생하여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모교인 임실 마암초등학교에서 2008년까지 교사로 재직하였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고, 1986년 6회「김수영문학상」, 1998년 12회 「소월시문학상」,2012년 제7회 윤동주 문학대상을 수상했다. 시 <섬진강> 연작으로 유명하여 일명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며 시집으로는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창비,13) 외 다수이다.
시평 서태수
봄의 어귀에서 고요한 솔숲의 사색에 잠겼다. 약동하는 계절에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고 나를 버리다니…. 시인의 역설적 발상이 단단하다. 종언終焉을 지향하는 가을의 버림이 아니라 새 생명의 충만을 위해 비우는 서정이다. 항아리는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것 아니던가.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잎사귀들이 눈을 뜨고 있다. 솔잎들이 가만히 내리는 세상의 봄을 맞아 새롭게 생을 맞이하는 준비가 한창이다. 지난 계절에 쌓였던 삶의 근심과 고단함을 내려놓은 우리들 텅 빈 손끝에 새로운 생명성이 파랗게 움트는 햇살 그득한 봄이다. 새롭게 약동하는 우리들 생의 솔숲에서 지난날에 얽매여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겠는가. 해맑은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박새들도 솔가지 사이로 가벼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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