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단군기원 사천삼백칠년 선운사 동구에서 지어 씀.
선운사 봄 춘백(春栢)은 4월 초가 절정
전북 고창 선운사 초입에 세워진 미당(未堂) 서정주 시비의 기록이다. 42년 전 딱 이맘때였나 보다. 막걸리 집 여자의 노랫가락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동백꽃은 푸지게 볼 줄 알았다. 남쪽 바다 언저리에서 동백꽃 소식이 들린 지 달포도 지났느니 지금쯤 절정일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랬다. 선운사 붉은 꽃나무는 동백(冬栢)이 아니라 봄 기운이 제대로 올라야 활짝 피는 춘백(春栢)이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3월말부터 4월초 사이에 절정을 맞는다.
2,000그루에 이르는 동백 숲이 언제 조성됐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정유재란(1597) 때 전소된 후 중건과정에서 스님들이 심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찰에서 동백나무는 방풍림이자 방화림이다. 두터운 잎 자체가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어서다. 선운사도 정유재란 이후에는 화재 피해가 없었다. 또 하나, 열매에서 짠 동백기름은 머릿기름이나 등잔불을 밝히는 용도로 유용하게 사용됐다. 숭유억불정책으로 가뜩이나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사찰로서는 짭짤한 수입원이었을 듯하다.
지금이야 철마다 관광객이 넘쳐나고, 전나무 숲이 아름다운 부안 내소사와 단풍명소 정읍 내장사를 말사(末寺)로 거느린 큰 사찰이지만, 중건 당시 선운사의 절간 살림이 얼마나 궁핍했는지는 대웅전 앞 만세루(萬歲樓)에 고스란히 남았다. 오래된 사찰마다 휘어진 큰 나무기둥을 그대로 사용해 자연의 미를 살렸다고 자랑하는데 비하면 만세루 기둥은 땜질의 흔적이 역력하다. 한눈에도 2개의 기둥을 잇댄 층이 확연하다. 서까래는 아예 굵기 맞추기를 포기했고 휘어짐도 심해 간격이 들쭉날쭉하다. 기둥을 받친 주춧돌마저 다듬은 흔적이 없는 막돌이다. 주변에는 그만한 나무도 없어 인근 변산반도에서 배로 실어 온 게 이 정도다. 그 궁핍함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연미에 검소함까지 더한 건축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가 됐다.
동백 숲은 대웅전 바로 뒤편 경사진 언덕이다. 잎은 검푸른데 빨간 꽃송이는 아직 듬성듬성하다. 다행히 먼 걸음 마다하지 않은 길손들 위로하느라 딱 한 그루만은 꽃송이가 풍성하다. 대웅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이 나무는 매년 다른 나무보다 개화가 1~2주일 빠르다. 모자람이 넘치는 것보다 나은 점은 희소성 때문이다. 단 한 그루지만 관광객의 감탄사와 웃음소리가 꽃잎처럼 흐드러진다.
이만하면 봄 날 선암사에 온 목적은 절반이상 달성한 셈인데, 아쉬운 발걸음이 절간 앞 도솔천을 따라 자꾸만 거슬러 오른다. 도솔천은 떡갈나무 잎에서 우러나온 탄닌 성분에 물빛은 검지만 갈겨니가 노니는 1급수다. 내쳐 약 2km 상류 도솔암까지 길을 잡았다. 숲길 양편으로 나뭇가지는 아직 앙상한데, 바닥은 진작부터 초록 융단이다. 봄 동백 이상으로 선운사에서 유명한 게 가을 꽃무릇이다. 부추를 닮은 잎은 지금이 가장 싱그럽다. 꽃무릇은 만물이 소생하는 5월에 사그라져 없는 듯 지내다가 추석 지나 9월이면 꽃대를 밀어 올려 선운사 전체를 주홍빛으로 물들인다.
도솔암 가는 길은 절반은 평지나 마찬가지고, 나머지 절반은 약간 오르막이지만 노약자도 힘들지 않을 정도다. 가끔씩 오가는 차량 먼지가 성가시다면 개울 건너편 탐방로로 걸으면 오히려 운치가 넘친다.
도솔암은 도솔산이라고도 부르는 선운산 계곡 깊숙이 자리잡았다. 선운산은 높이(해발 336m)에 비해 계곡이 깊고 바위절벽도 웅장하다. 가히 고승이 구름(雲) 속에서 참선(禪)할 만한 곳이다. 암자 뒤 바위절벽엔 국내에서 가장 큰 마애불이 자리잡았고, 절벽 꼭대기에는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하는 지장보살을 모신 내원궁이 위치한다. 맞은편은 1,000마리 말이 한꺼번에 뛰어오를 형세라는 천마봉이다. 봉우리 정상으로 오르는 수직 계단은 보기만해도 어질어질하다. 내원궁과 천마봉 사이 짧지만 깊은 계곡은 선운산의 최대 절경으로 꼽힌다. 선운사에서 동백만 보고 발길을 돌렸다면 아쉬움이 클 뻔했다.
미당시문학관과 질마재 이야기
미당 시비가 선운사 동구에 세워진 까닭은 고창이 미당 서정주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불과 7km, 차로 10분 거리인 부안면 선운리 고향마을에 ‘미당시문학관’자리잡고 있다.
폐교된 봉암초등학교 선운분교를 개조한 문학관은 그의 시만큼이나 소담스럽다. 70년에 이르는 그의 작품 활동과 관련한 전시물은 여느 문학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옥상으로 연결되는 계단 난간에 전시한 30여점의 설산 사진이 눈길을 끈다. 히말라야를 비롯해 말년에 10여년 간 세계를 여행하면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초인적 자연의 혼에 닿으려는 시심을 표현한 듯 사진 속 설산은 계단을 오르며 점점 고도를 높여간다. 4층 한 칸엔 미당도 지우고 싶고, 그를 아끼는 이들도 감추고 싶어하는 친일작품 7점을 걸었다.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거의 모든 기념관이 찬양일색인데 비하면 진일보한 모습이다.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평가까지 관람객의 몫으로 남겼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공간이다.
옥상에 오르면 정면에 미당의 고향마을인 질마재마을 너머로 곰소만과 변산반도의 능선이 드넓게 펼쳐진다. 질마재는 마을이름인 동시에 부안면소재지로 넘어가는 소요산 자락 고개다. ‘질마’는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실을 수 있게 얹는 장비인 길마의 사투리, 등짐에는 주로 소금이 실렸다. 현재는 마을 앞으로 제법 들이 넓지만, 예전에는 집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마을이었고 염전도 있었던 모양이다.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 있었습니다.’ 미당의 외가 담벼락에 쓰여진‘해일’(시집 ‘질마재 신화’, 1975)의 한 대목은 당시의 마을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창군은 선운사에서 질마재를 넘어 미당시문학관에 이르는 옛길을 정비해 ‘질마재길’이라 이름 붙였다. 선운사 초입에서 걸으면 약 8km, 2시간은 족히 걸린다.
선암사 주변 식당은 주요 메뉴가 ‘풍천장어’ 구이다. 선운사 앞 인천강은 밀물 때면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밀려들고 물이 빠지면 모래사장이 아닌 뻘이 드러난다. 풍천은 이러한 지형을 이르는 말이고, 이곳에서 잡은 장어가 풍천장어다. 일부 자연산 장어를 잡기도 하지만 대부분 식당에서는 고창 여러 지역에서 양식하는 장어를 사용한다.
이맘때 고창 나들이에 나서면 공음면 ‘학원관광농원’의 청보리밭도 함께 볼 만 하다. 올해 축제는 이삭이 패기 시작하는 다음달 16일 시작하지만, 이미 한 뼘 정도 자란 보리가 드넓은 들판을 시원하게 초록으로 뒤덮고 있다. 하루 일정이면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에서 학원관광농원-선운사-미당시문학관 순으로 동선을 짜면 된다. 선운사와 미당시문학관만 보려면 선운사IC를 이용하는 게 빠르다.
고창=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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