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어디긴, 신들의 나라지.”
2014년 12월 중순 인도의 고대 도시 바라나시.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갠지즈 강가에서는 때마침 ‘푸자’라고 불리는 힌두의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일곱 명의 꽃미남 브라만들은 금빛 제기를 높이 들고 강의 여신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수 백명의 순례자와 관광객들은 그들을 겹겹이 에워싼 것도 모자라 강에 수 십척의 쪽배를 띄운채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제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푸자는 자그마치 3,000년 이상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계속됐다고 한다.
실크로드 도시 바라나시는 블랙홀이었다. 사십대 후반에 처음 힌두를 접한 내게 이 도시는 종교도 시간도 삶과 죽음도 모두 빨아들이는 그 무엇이었다. 소유가 거추장스럽고 빈 몸의 자유만 빛을 발하는 이곳에 내 영혼의 일부도 빨려들어간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전직 남파간첩을 통해 실크로드에 눈을 떴다. 1990년대 말 교수간첩으로 우리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 무함마드 깐수, 바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다. 경북 경주의 한 호텔에서 ‘경주실크로드 프로젝트 설명회’가 열린 2012년 10월31일 난 인터뷰를 위해 그와 마주앉았다. 정 소장은 “경주가 실크로드의 동단(東端), 즉 동쪽 끝 도시”라며 “실크로드는 문명 교류의 통로”라고 잘라 말했다. 그 전까지 경주가 실크로드 도시라고 이렇게 내놓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뻥치시네’라는 생각과 ‘사실이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동시에 들었다.
평생 실크로드학을 연구해온 노학자의 말은 일상에 파묻힌 어린 시절 환상을 자극했다. 어릴 때 실크로드는 손오공의 여의봉, 알라딘의 마술램프와 동격이었다. 대학 시절 역사를 전공하면서 타클라마칸 사막이란 단어가 입력되기는 했지만 실크로드의 실체는 뜬구름이었다.
1992년 신문사 입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취재 현장에서 실크로드를 만날 일도 없었고, 마감시간에 허덕이느라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마음속 화두를 꺼집어내 준 것이다. 20년 넘게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의 무기력함도 떨쳐버리고 싶었고, 원고지 20매 이상 글을 써본 기억이 가물한 터라 호흡이 긴 문장에 대한 갈망도 있었다. 무엇보다 답사가 가져다 주는 해방감에 목말랐다. 결국 깐수를 만난 그날 난 인생의 외도 메뉴로 실크로드를 찍고 말았다.
그의 드라마같은 인생도 내 가슴에 불을 질렀다. 1934년 중국 연변에서 태어난 그는 베이징대학교 동방학부를 수석졸업한 후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외교관의 길을 걷다 북한행을 선택했다. 평양 외국어대 동방학부 교수로 일하던 그는 해외를 떠돌다 1984년 레바논계 필리핀 사람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같은 대학에서 교수로 강의하다 1996년 7월 국가보안법 혐의로 검거됐다. 12년형을 선고 받은 그는 2000년 8월15일 광복절특사로 출소했고 2003년 4월30일 특별사면 및 복권된 후 5월14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가 지금까지 취득한 국적은 중국, 북한, 레바논, 필리핀에 이어 현재 대한민국 5개로, 이 분야 기네스북감이다.
무려 12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실크로드 문명기행’,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실크로드 사전’ 등 다수의 저서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이븐 바투타 여행기’ 등 역주저를 남기고 있다.
실크로드는 그 날 마음 속에 제대로 각인됐고 한 달여 후 그와 중국의 시안, 둔황을 같이 답사하는 행운을 얻게 됐다. 덕분에 옥문관과 막고굴 등 실크로드 현장에서 문명교류학 대가의 해설을 듣는 호사를 누렸다. 3년 반에 가까운 시간을 되집어보니 터키와 우즈베키스탄, 이란, 인도, 러시아, 몽골 등 전통적인 실크로드 국가들을 대부분 답사했다.
답사 중 만난 바라나시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갠지즈강 가는 길에는 노란색 나트륨등 아래서 힌두교도들이 개들과 뒤엉켜 자고 있었다. 갠지즈 강물을 마시고 죽으면 윤회의 사슬이 끊어진다는 믿음 때문에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힌두교도들이 꾸역꾸역 갠지즈로 몰려드는 것이다. 꼴이 말이 아니지만 얼굴은 평화롭다.
‘나도 강물을 한 번 마셔봐’라는 생각은 강가의 화장터를 보는 순간 사라졌다. 화장한 유골 가루들이 고스란히 강물과 섞이고 있는 것이다. 화장터 사진을 찍으려니 현지인들의 고함이 터진다. ‘촬영 금지’라는 것은 눈치 코치로 안다. 망자의 영혼이 카메라 안으로 빨려들어간다는 믿음 때문이란다.
10억 힌두교도의 성지인 바라나시의 주요 생산품은 비단이고, 생산자는 이슬람교도다. 불교의 태동지인 인도에서 신자가 0.76%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지만 이 곳은 불교 4대 성지의 하나인 사르나트가 있는 도시다. 이 도시에는 나체주의자인 자이나교도와 기독교 등 온갖 종교가 용광로처럼 녹아있었다. 힌두교에만 신이 3억을 넘는다고 하니 가히 신들의 나라라는 호칭이 무색치 않다.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인 시바신의 성기 상징물에 멋모르고 머리까지 조아린 나에게 실크로드는 물음표다. 답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실크로드’라는 말을 들으면 심장이 뛰는 걸 보면 다시 배낭 짊어질 날이 머지않았다.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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