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프로축구를 뜨겁게 달궜던 이른바 ‘깃발라시코’(깃발+엘클라시코ㆍ이긴 팀 구단기를 패배한 팀 구단에 거는 것)가 흥행 대박을 쳤다. 수원FC와 성남FC의 경기가 열린 19일 수원종합운동장에 1만2,825명의 관중이 들어찼다. 현장에 온 국가대표 울리 슈틸리케(62ㆍ독일) 감독도 깜짝 놀랐다. 결과는 사이 좋게 1-1. 두 구단 모두 상대 깃발이 홈 구장에 걸리는 참사(?)는 피했다.
‘깃발라시코’의 기획자격인 이재명(52) 성남시장은 프로축구계에 ‘돈키호테’처럼 등장했다. 2014년 말, SNS에 ‘불공정’ ‘승부조작’ 등의 단어를 써가며 불리한 판정을 지적했다. 다수 언론과 관계자들은 경솔한 처사라며 이 시장을 비판했다. 반면 많은 팬들은 이 시장을 지지했다. 그는 부당한 축구계에 맞서는 투사 대접을 받았다. 뿌리 깊은 심판 불신 풍조도 ‘이재명 열풍’에 한 몫 했다.
프로축구 종사자의 십중팔구는 ‘정치’하면 고개를 흔든다. ‘구태’를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시민구단의 낙하산 인사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 폼만 잡고 축구단을 친위조직처럼 활용했다. K리그는 시민구단 덕에 양적 팽창에 성공했지만 그로 인한 질적 저하와 더딘 발전을 감수했다.
이재명 시장도 성남을 시민구단으로 전환할 때 정치적 계산을 했다. 자신의 입지에 도움이 될 지를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초대 사령탑 선임도 다분히 정치적 노림수로 보였다. 유력 야당 정치인의 입김에 박종환 감독을 선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박 감독은 결국 넉 달도 안 돼 선수 폭행으로 물러났다. 이 시장은 SNS에 남긴 글 때문에 2014년 12월, 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는데 상벌위원회 출석 직전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난 정치인이다. 손해 보는 일은 안 한다.”
하지만 이 시장은 적어도 축구단을 정치적 도구로만 삼지는 않았다. 결과물이 말해준다. 성남은 2014년 FA컵 우승, 2015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의 깜짝 선전, 정규리그 5위 등 놀라운 성적을 냈다. 관중도 크게 늘었다. 평균 유료 관중이 2014년 1,021명에서 작년 3,298명으로 227% 늘었다. 클래식 12팀 중 최고 증가율이다. 올 시즌 홈 개막전이었던 12일 수원 삼성과 경기에 1만4,504명이 입장해 ‘축구불모지’ 탄천에 봄이 왔음을 알렸다. 숙원사업이던 클럽하우스 건립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시장은 2014년 9월, 긴급 소방수로 김학범(56) 감독을 영입하며 “내 이름 팔아 선수 청탁 하는 사람 있으면 주저 말고 알려 달라”고 핫라인을 알려줬다. 시민구단의 폐해 중 하나인 선수 청탁의 고리를 끊기 위해 바람막이를 자처했다. 그는 축구를 정치적으로 잘 이용하려면 축구단부터 제대로 운영해야 한다는 걸 몸소 보여줬다. 이 시장의 행보는 이제 성남을 넘어 K리그 전체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 시장은 수원FC와 경기 뒤 염태영(56) 수원시장과 나란히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이 시장이 “다음은 시장실을 점령할까”라며 웃자 염 시장은 “패한 쪽이 상대 유니폼을 입고 시장 업무를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팬들께서 아이디어를 주시면 검토하겠다”며 깃발라시코 2탄을 예고해 팬들을 설레게 했다. 사실 이 시장은 이전에도 가끔 공식 기자회견에 느닷없이 등장해 ‘빈축’을 샀다. 하지만 이날은 두 시장을 손가락질 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정치인과 축구’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바뀐 느낌이다.
윤태석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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