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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팀 경성 친선경기 성사 시켰지만... 시대의 마운드서 퇴장당해

입력
2016.03.20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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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EAN'이라는 마크를 가슴에 박은 박석윤의 모습. 동아일보 1920년 8월 2일자 자료.
'COREAN'이라는 마크를 가슴에 박은 박석윤의 모습. 동아일보 1920년 8월 2일자 자료.

1910년대 중반 일본 도쿄에는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이 많이 모였다. 조선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근대 분과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 수는 대략 500여 명 내외로 추산된다. 이 시기의 유학생들은 친일과 반일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거의 모두가 조선을 근대화된 문명국가로 만들겠다는 민족주의적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법학과 경제학, 정치학 등을 전공하는 빈도가 높았고, 우리에게 ‘무정’으로 이미 익숙한 이광수는 와세다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최승만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인 교수가 “조선 학생들 공부하는 것을 본받으라”고 일본 학생들을 꾸짖었을 만큼, 도쿄의 조선 유학생들은 근대를 배우는 데 열심이었다. 식민지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제국의 심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들 모두가 ‘근대를 배우기 위해 진격하는 독학자’였다.

1910년대의 유학생 중 한 명이었던 박석윤은 연구자에게도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근대를 살아냈으며, 무엇보다도 근대를 쟁취하기 위한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박석윤은 1911년에 일찌감치 유학길에 올라 도쿄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했다. 1916년에는 교토의 제3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1919년에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에 진학해 영국법을 전공했다. 이것은 그 시기 유학생으로서는 흔한 이력이다. 조금 독특한 이력을 추가해 보자면 ‘학지광’이라는 학술잡지의 편집부장을 맡았고, 순문예잡지 ‘창조’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받아들인 근대의 표상은 자신의 전공이나 이러한 활동과는 무관한 데 있었다. 바로 ‘야구’였다.

져선 안 되는 유학생야구단 모국 원정 경기

박석윤이 언제부터 야구를 배웠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학 시절 내내 야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유학 초기부터 소년야구단을 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제3고교 시절에는 야구부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좋은 ‘좌완투수’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빠른 몸쪽 커브를 잘 던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쿄유학생야구단’의 주축 선수였다.

그 시기 유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근대 스포츠를 접했고, 그것을 즐겼다. 1915년의 기록에 따르면 그 종목과 인원의 수는 “베쓰뽈 50인, 풋뽈 18인, 뽀-트 50인, 유술격검 12인, 승마 50인” 등으로 다양하다. 이 중 야구를 즐기는 50인이 도쿄유학생야구단의 멤버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조선야구의 발전에 기여한 바는 크다. 유학생야구단은 1909년을 시작으로 1937년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조선원정길에 올라 조선의 학생야구팀, 혹은 일본 클럽팀과 일전을 펼친다. 그 과정에서 일본에서 익힌 여러 야구술과 경기규칙이 조선에도 전파되었다. 1913년에 황성YMCA야구단이 해체되고서는 이들의 모국 방문이 야구계의 가장 큰 이벤트였다. 조선체육회에서도 이들의 방문을 환영했고, “수비공격의 기발한 기능은 조선야구계에서 처음 보는 것”이라 평했다.

박석윤은 원정 경기를 마치고 오면 그것을 상세히 기록해 잡지에 연재하곤 했다. 그가 참가했던 1918년과 1920년 여름의 원정 경기는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의 기관지 ‘기독청년’과 ‘현대’에 각각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그에 따르면 유학생 야구단은 언제나 ‘전승’을 목표로 했다. 일본 클럽팀과 경기를 할 때는 조선의 청년들이 함께 모여 열렬히 응원했고, 그들 역시 ‘전쟁’이라고 표현할 만큼 사활을 걸고 경기에 임했다. 철도구락부에 9대 15로 패하고 나서는 “치욕을 아는 남자로서 반드시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세한다”고 쓰기도 했다. 일본 팀에 이겨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다.

그런데 유학생 야구단과 조선 학생 야구팀 간에는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우선 유학생 야구단은 한 수 아래의 팀을 상대한다는 태도를 늘 드러냈다. 경기의 목적이 ‘계몽’에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서로 간의 위계를 나누었다. 특히 박석윤은 적은 점수 차로 이기면 “창피하게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선 학생 팀이 가진 부족함을 강하게 질타했다. 예컨대 응원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페어플레이 정신이 부족하다는 것, 혹은 규칙을 알지 못 하고 야구한다는 것 등이었다.

야구는 문명과 근대의 스포츠로 소개되며 청년들을 유혹했다. 야구를 하는 청년들이 육체 위에 덧입은 “멋진 유니폼과 스파이크가 박힌 야구화”는 그들 스스로를 눈부시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독청년 1918년 10월호 자료
야구는 문명과 근대의 스포츠로 소개되며 청년들을 유혹했다. 야구를 하는 청년들이 육체 위에 덧입은 “멋진 유니폼과 스파이크가 박힌 야구화”는 그들 스스로를 눈부시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독청년 1918년 10월호 자료

전조선야구단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대결

1910년대 중반 청년 세대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잡지 ‘청춘’의 창간호에는 ‘야구’를 주제로 한 기사가 한 편 실렸다. 그에 따르면 야구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규칙이 엄격, 명백하고 절차가 정돈되고 가지런하여 가히 문명적 경기라 할 만하다.” 야구가 가진 복잡한 규칙들은 이처럼 야구에 ‘문명적’이라는 환상을 덧입혔다. 야구는 근대라는 규율 권력의 시대를 표상하기에 알맞은 스포츠였다. 그 규칙을 이해하고 선수가 되어 그라운드에 선다는 것, 혹은 아는 체하며 관람객이 된다는 것이 모두 근대인이 되는 길로 받아들여졌다.

박석윤 역시 야구가 가진 ‘복잡한 규칙’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규칙에 대해 연구하고 복종하는 것을 선수의 미덕으로 여러 차례 제시했다. 그가 조선 원정을 다녀와 “조선의 학생 팀은 희랍 시대의 규칙을 아직 채용하고 있는지 그에 대한 연구가 없다. 선수 제군의 sportsman으로서의 행동에 다대한 반성을 구한다”라며 영어 원문으로 된 야구 규칙을 글에 첨부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도쿄와 경성의 조선 청년들이 야구장에서 만나는 일은 근대를 쟁취하기 위한 경합이었다. 유학생들은 자신들이 조선의 근대를 선도하고 있다고 믿었고, 경성의 조선 청년들은 자신들이 그에 뒤지지 않는 근대인임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모든 시합이 그렇지만, 특히나 더 져서는 안 되는 시합이었던 것이다.

1922년 12월 8일 경성의 만철운동장에서는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과 전조선야구단 팀의 친선경기가 열렸다. 이러한 이벤트를 성사시킨 인물은 박석윤이었다.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이 일본 몇 개 팀과의 친선경기를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는 동안 박석윤은 그들과 교섭했고, 돌아가는 길에 한국을 경유해 경기를 치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경성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뉴스에서는 연일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조선야구단이 조직되었고 당연히 조선에서 야구를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거기에 박석윤이 있었다. 그는 전조선야구단의 주장 겸 선발투수를 맡았다. 박석윤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그날 운동장은 경기를 보러 온 경성 시민들로 만원이었다. 경기 결과는 23대 3, 당연하겠지만 큰 점수 차이로 졌다. 박석윤은 그날 완투를 했고, 패전투수로 기록되었다. 23점을 내주는 동안 그는 계속 마운드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정말로 즐거웠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그가 원하는 ‘근대인’이 되었다는 하나의 이정표이기도 했다. 경성의 야구장에서 메이저리그 선수를 상대로 공을 던지는 일, 그것이 그를 얼마나 가슴 벅차게 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우리 근대사를 통틀어 어느 한 개인이 가장 행복감에 고양되었던 순간이기도 하다. 이광수가 소설 ‘무정’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자신의 아호를 외로운 배 ‘고주(孤舟)’에서 봄의 정원 ‘춘원(春園)’으로 바꾸었을 때의 심정과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기록되지 못할 길 선택한 근대 야구의 독학자

이후 박석윤은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야구부 감독을 잠시 맡았다. 1923년에 휘문고보는 일본중등학교야구대회(고시엔)에 조선 대표로 출전한다. 예선에 참가한 8팀 중 7팀이 조선의 일본인 중학교였음을 감안하면 출전권을 얻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본선 1회전에서 대련상업학교를 9대 4로 이겼고, 이어지는 8강에서 리쓰메이칸 중학을 만나 5대 7로 분패했다. 김정식을 비롯한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 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박석윤은 조선 야구사 ‘최초의 기록’을 많이 쓴 인물이다. 메이저리그 선수를 상대로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 첫 번째 선수이고, 자신의 선수들을 고시엔 8강으로 이끈 처음이자 마지막 감독이다.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박석윤은 여전히 야구를 했다. 야구계에서는 영향력이 있는 인사였고, 김정식을 비롯한 그의 휘문고 제자들은 조선 야구의 주축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정갈한 유니폼을 갖춰 입고 마운드로 달려가던 1910년대의 순수한 청년이 아니었다.

1924년 오사카중학야구단과 원정경기에서 승리한 뒤 박석윤 감독과 휘문고보야구단 선수들이 단체로 찍은 사진. 더베이스볼 2012년 12월호 자료.
1924년 오사카중학야구단과 원정경기에서 승리한 뒤 박석윤 감독과 휘문고보야구단 선수들이 단체로 찍은 사진. 더베이스볼 2012년 12월호 자료.

2ㆍ8독립선언과 3ㆍ1운동의 실패 이후, 유학생을 비롯한 많은 조선 청년들은 혼란에 빠졌다. 총독부에 포섭 당하기도 했고, 일제와 협력하는 것이 민족을 위한 길이라 스스로 믿기도 했다. 박석윤 역시 그 이후 잘못된 길을 걸었다. 만주 ‘민생단 사건’의 주역이었으며 일제의 외교관으로 독립인사들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한국 야구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광복 이후 북한으로 피신했다가 ‘민족반역자’로 규정되어 사형을 받는다. 법정에서 자신은 조선 자치를 이념으로 삼았으며 일본인에게 조종된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글은 박석윤을 미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결국 자신이 믿었던 근대의 표상에서 무엇도 배우지 못했다. ‘COREAN’이라는 자수를 놓은 유학생야구단의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서면서도, 정작 그 안에서 ‘민족’을 읽어내는 데 실패한 셈이다. 누구보다도 민족을 부르짖기는 했으나, 그것은 일제가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었다. 그를 비롯해 많은 근대의 독학자들이 그러한 함정에 쉽게 빠져들었다. 도쿄 유학 시절 보여준 순수함을 끝까지 지켜낸 인물들은 많지 않다. 그들은 스스로를 근대인이라 여겼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근대인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박석윤과 1910년대의 유학생들뿐 아니라, 독학하기 위한 순수함으로 가득 찬 ‘시대의 개인’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대학이나 연구소 같은 제도권에 속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의 모든 개인은 시대의 독학자이다. 그 순수함이 어떤 권력이나 폭력에 변질되지 않도록 소중히 간직해 나가야 한다. 박석윤은 스스로 시대의 마운드에서 내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그 위에 있기 때문이다.

김민섭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저자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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