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원 흑삼 165만원에 팔아
“이력서 보고 연락했어요. 면접 보러 오시겠어요?”
지난해 11월 초 I사 직원의 전화를 받은 A(42ㆍ여)씨는 뛸 듯이 기뻤다. 남편 월급으로 빠듯한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 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등록한 지 6개월이 넘었지만 면접 제의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해보려 해도 나이가 많다며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16년간 백화점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던 경력은 통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잃어가던 차, 작은 회사지만 사무직 직원으로 일해보자는 제안은 반갑기만 했다.
면접에서 만난 박모(52ㆍ여) 대표는 I사를 한국 건강식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무역회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A씨에게 “수습기간 성실하게만 일하면 정직원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급여 150만원에 4대 보험이 보장되는 번듯한 자리였다. 유치원생 아들을 둔 A씨로선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근로시간도 욕심나는 조건이었다. 무엇보다 “A씨 같은 인재는 특별히 회계관리를 시키고 싶다”는 대표의 칭찬이 맘에 들었다.
하지만 출근한지 일주일이 될 무렵 박씨와 직원들은 A씨에게 “실적이 없으면 정직원 전환이 어렵다”며 일단 회사 제품을 산 뒤 나중에 거래처에 팔아 보상받으라고 했다. 직원들은 각서라도 써주겠다는 말로 망설이는 A씨를 안심시켰다. 165만원을 주고 흑삼 1박스를 산 A씨에게 대표는 “특별히 챙겨준다”고 꼬드기며 계속 구매를 권유했다.
A씨는 결국 대출까지 받아 2,000만원어치의 흑삼을 산 뒤에야 정직원이 될 수 있었다. 정규직이 돼 한 업무는 ‘또 다른 A씨’를 찾는 일이었다. A씨는 구직사이트에서 40~60대 여성의 이력서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이어지는 중노동이었다. 동료들 역시 흑삼이나 공진환 2,000만~3,000만원어치를 사고 정직원이 된 주부들이었다. 그러나 꼬박꼬박 준다던 월급은 3개월째 감감무소식이었다. A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흑삼 가격을 수소문했고, 고작 30만원짜리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사기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서울 혜화경찰서는 40~60대 경력단절 여성들만 골라 취업을 미끼로 건강식품을 판매한 I사 대표 박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18일 밝혔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기 피해자는 6명이지만 경찰은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할 예정이다.
신혜정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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