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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손 돕고 마음 주고받고… 이젠 그리워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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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손 돕고 마음 주고받고… 이젠 그리워진 풍경

입력
2016.03.18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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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똥 기저귀를 그보다 젊은 할머니가 갈아드리는 곳, 상대에게 태연히 나를 맡기는 이곳이 유토피아 아닐까. 보리 제공
할머니의 똥 기저귀를 그보다 젊은 할머니가 갈아드리는 곳, 상대에게 태연히 나를 맡기는 이곳이 유토피아 아닐까. 보리 제공

조혜란 지음

보리ㆍ57쪽ㆍ1만2,000원

할머니 한 분 누워 계시다. “해골바가지 같은” 재동이네 증조할머니. 아직 건장한 이웃 옥이 할머니에게 앙상한 아랫도리를 맡긴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기저귀를 가는 중. 백발이 떡 진 머리맡에 잎과 열매 달린 앵두나무 한 가지, 앵두랑 오디를 담은 사기대접, 곁에서 비쩍 마른 할머니 엉덩이를 들여다보는 옥이와, 할머니가 벗어놓은 꽃무늬 바지가 차례로 보인다. 재동이 증조할머니의 시선이 머무는 곳엔 앵두며 오디를 입에 문 새들이 날고 있다. 맥락 없이 보면 사뭇 기이해 보일 법한 이 풍경은 ‘옥이네 계절 이야기’ 시리즈의 여름 편, ‘할머니, 어디 가요? 앵두 따러 간다!’ 속 한 장면이다.

좀 전에 옥이와 할머니는 산딸기를 따 가지고 오다가 마늘 캐는 재동이네를 보자 당연히 그 일을 거들고, 그 집 뒤꼍에 한 가득 열린 앵두며 오디 ‘채취권’을 선물로 받았다. 열매를 따던 두 사람은 젊은 시절 그 나무들을 심었다는 재동이네 증조할머니가 생각났다. 오디 한 움큼, 앵두 한 움큼 대접에 담아 노환 중인 할머니 방에 성큼 들어섰다. “오줌 냄새, 방귀 냄새 풀풀 나는” 방. 증조할머니 앵두를 받아 드시다 “헉!” 하고 숨을 멈췄다. 옥이 할머니가 재빨리 등을 내리치자 “캑!” 하고 노란 앵두 씨 하나 튀어나왔다. 증조할머니 다시 숨을 쉬고, 옥이와 할머니도 다시 숨을 쉬었다. 그 결에 재동이네 증조할머니 오줌을 저리신 거고, 그랬으니 옥이 할머니가 기저귀를 갈아 드리는 거다. 제 부모도 아닌 이웃 노인의 냄새 나는 기저귀를 갈아주는 옥이 할머니나, 제 자식도 아닌 이웃 아낙에게 아랫도리를 내맡기는 재동이 증조할머니나 아무 스스럼이 없다.

이 그림책을 펼쳐 이 장면에 이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이곳이 유토피아 아닌가. 남의 바쁜 일손 돕는 것이 당연하고, 고마운 마음 주고받는 것이 선선하고, 늙고 병든 이가 풍기는 냄새와 그 냄새 나는 공간 속에 들어서는 일이 아무렇지 않고, 그의 불편을 덜어줌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내가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내 불편 덜어주는 이에게 태연히 나를 맡기는 그런 사람들, 그런 마을, 그런 세상. 그러니 창 밖은 푸른 하늘 뭉게구름 탐스러우며, 늙고 병든 할머니는 그 하늘을 나는 새들 방안으로 불러들여 지저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그림책 속의 마을, 거기 사는 사람들은 대개 이처럼 수더분하다. 스스럼없이 시원시원하게 정과 수고를 나누며 산다. 무엇이 그럴 수 있게 할까. 책 속을 뒤져 본다. 산, 들, 뻘, 바다, 거기서 나는 것들로 성실히 먹고 살고 자식 학교 보내는 것을 넘어서지 않는, 그저 냅두면 알아서 잘 사는 소박한 욕망들, 그래서 지켜지는 인간에 대한 예의. 책장을 덮으며 아픈 마을들을 떠올린다. 대추, 강정, 밀양, 사드가 들어설 그 어느 곳....., 그뿐일까, 돈과 힘에 망가진 마을들이. 김장성ㆍ그림책 작가(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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