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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입력
2016.03.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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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3월 18일

19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문화원(왼쪽)과 구속된 문부식씨.
19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문화원(왼쪽)과 구속된 문부식씨.

1982년 3월 18일 오후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중구 대청동 미국문화원 정문을 따고 들어가 복도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일부는 인근 국도극장과 유나백화점에서 거리로 유인물을 뿌렸다. 유인물에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광주 시민을 무참하게 살해한 전두환 파쇼정권 타도하자’ ‘전두환 정권은 무기를 사들여 북침준비를 이미 완료하고 다시 동족상잔을 꿈꾸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한국에서 물러가라’는 등 주장이 담겨 있었다.

5ㆍ18 광주 학살을 자행한 군사정권과 그 행위를 지시했거나 묵인ㆍ방조한 미국의 제국주의 실체를 국민에게 알리자는 게 그들의 의도였다. 불은 2시간여 만에 진화됐지만, 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대학생 1명이 숨지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방화와 전단 살포ㆍ모의 등 혐의로 김현장(1950~, 배후조종 혐의)과 문부식(1959~, 현장 지휘) 등 11명이 검거됐고, 천주교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 등 4명이 국가보안법 위반과 범인 은닉 등 혐의로 구속됐다.

그들의 주장은 과도했다. 예컨대 ‘살인마 전두환 북침준비 완료’는 진실과 허위 혹은 과장이 혼재된 주장이었다. 극좌 테러리즘적 투쟁 방법을 답습, 무고한 희생을 초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광주 학살의 진실을 알리는 충격적인 계기가 됐다. 방화 이후 한국 사회의 ‘반미(反美)’ 이슈가 비로소 표면화했다. 앞서 1980년 12월 9일 전남 광주에서도 가톨릭농민회 회원 등이 주도한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지만, 밤에 이뤄진 일인데다 피해도 적어 대다수 국민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학가 등 각종 시위 현장에서 반미 구호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다. 한달 뒤인 82년 4월 강원대 성조기 소각사건, 한 해 뒤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 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86년 5월 부산 미문화원 점거 사건. 앞서 86년 4월 28일, 당시 서울대 4학년이던 김세진 이재호가 분신했던 서울대생 전방입소 반대 시위의 가장 도드라진 구호도 “반전 반핵 양키 고홈”이었다.

김현장, 문부식은 83년 3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지만 일주일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문부식은 88년 12월, 김현장은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특사로 풀려났다. 문부식은 출판사를 운영했고 진보신당 당직자로도 잠깐 일했다. 김현장은 전민련 활동을 이어가며 임수경 방북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렀지만, 93년 가석방된 뒤로 전향, 신한국당과 새누리당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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