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은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로 기억되기에 충분할 만큼 여러 화제와 화두를 남겼다. 자율주행 장치 등 인공지능이 일상 생활에 부분적으로 도입되고 있지만, 이번 대국만큼 기계의 발전(진화라고 해야 더 적합한 느낌마저 드는)을 실감하게 해준 사건은 여태까지 없었다. 다섯 번의 대국이 진행되는 동안 알파고를 대신해 돌을 놓고 이세돌의 수를 컴퓨터에 입력한 아자 황 역시 눈길을 끌었다. 인공지능의 손이 되어준 대리인이자 개발자 중 한 명이기도 한 그의 존재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이 기묘한 모습에서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에 등장하는 자동 장기 기계를 떠올린 이들도 있을 것이다. 1940년 나치를 피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건너가려다 실패하자 자살을 택한 벤야민이 쓴 마지막 글인 이 글은 언제나 승리하는 장기 기계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이 장기 기계는 상대방의 수에 반대 수를 둬서 매번 이기게 되어 있는데, 터키 옷을 입고 입에는 물담배를 문 인형이 책상 위에 놓여진 장기판 앞에 앉아 있다. 책상은 거울로 뒤덮여 있어 내부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 장기 고수인 등 굽은 난쟁이가 숨은 채 줄로 인형의 손을 조종해 장기를 둔다. 벤야민이 다소 기이한 (요즘 같으면 오리엔탈리즘적이라고 비판 받을 법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이어지는 이 말을 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철학에서도 이러한 장치에 대응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항상 승리하게끔 되어 있는 것은 소위 ‘역사적 유물론’이라 불리는 인형이다. 이 역사 유물론은, 만약 오늘날 알다시피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어차피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면 안 되는 신학을 자기 편으로 삼는다면, 누구하고도 한판 승부를 벌일 수 있을 것이다.”
파편적인 벤야민의 글답게 난삽하고 해석이 분분한 구절이지만, 대강의 요지는 유물론이 신학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다. 액면만 놓고 본다면 진보의 이념을 믿고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여긴 유물론이 종교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니 논란을 피할 수 없었다. 구원을 기다리는 메시아주의라는 비판도 있었다. 심지어 이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을 위협이라고 여긴 소련의 비밀 경찰이 벤야민을 암살했다는 픽션과 이를 진지하게 여기는 철학자도 있다. 한편 최근에는 벤야민의 바람대로 신학이 궁지에 몰린 정치철학의 구원 투수로 등장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이기도 한다.
정치철학과 마르크스주의와 유대신학 등을 둘러싼 설왕설래를 뒤로하면 자동 장기 기계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상황, 나아가 정치철학 일반에 관한 일종의 우화이기도 하다. 정치적,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나날이 득세하는 전체주의자들과 승부를 벌여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현실의 판세는 어둡기 짝이 없다. 예상된 패배 앞에서도 역사의 진보를 믿고 아름다운 순수성을 고수해야 할까. 아니면 여태껏 같은 편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난쟁이의 도움을 청해야 할까. 설령 그렇다 해도 강호의 진짜 고수는 어디서 찾을 것이며, 과연 이긴다는 보장은 있는가. 어려운 질문이 꼬리를 문다. 다소 억지를 부리자면, 파시즘이 나날이 세를 확장하던 1930년대 말 유일한 대항세력이던 독일 사민당에게 전하는 벤야민의 이 메시지를 한국의 정치에 견주어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여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진정성과 선명성 고수를 잠시 후퇴시키고,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고수에게 도움을 청한다. 난쟁이가 책상 밑에 숨지 않고 전면에 나서 터키풍 인형 몫까지 한다는 것이 다르고, 실제로 장기의 고수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긴 하지만.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제대로 수를 두기도 전에 책상이 엎어져 산산조각 나버렸다는 점이다. 곧 다가올 대국을 앞두고 기계장치가 누더기가 된 지금 한국사회의 미래는 벤야민의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