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경영평가 지표에 포함
‘사회적기업 지정된 여성기업’ 등
이중 실적 위해 중복인증제품 선호
의무구매비율 총구매액의 1% 불과
강제사항 아니라 실제론 더 적어
종이제품을 생산하는 A 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원장 김모(53)씨는 지난해 말 한 공기업에서 공고한 ‘점보롤 화장지’ 입찰 참가를 포기했다. 해당 공기업이 내건 입찰 자격은 ‘중증장애인생산시설로 지정된 사회적기업’이었는데 A시설은 재활시설이어서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김씨가 입찰을 포기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공기업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시설관리공단 등 다른 공공기관들도 비슷한 입찰 조건을 제시하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김 원장은 16일 “실적을 채우려는 공공기관이 장애인 생산품과 사회적 기업 생산품으로 모두 인증받을 수 있는 제품만 선호한다”며 “장애인 생산품을 우대하겠다는 우선구매제도의 취지가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사회적 약자의 경제활동을 돕겠다며 우선구매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정작 장애인 재활시설 생산품은 의무구매 비율이 낮고 중복 인정이 안 돼 오히려 외면 당하고 있다.
정부는 2008년 중증장애인 시설을 시작으로 중소기업(2010년), 여성기업(2014년) 등에 대해 우선구매제도를 도입했다. 기획재정부와 행정자치부의 공공기관 경영평가에도 반영한다. 그러나 전체 근로자 중 장애인 고용 비율이 70% 이상인 사업장에서 생산하는 중증장애인 제품의 경우 의무적으로 구매해야 하는 비율이 총 구매액의 1%에 불과하다. 여성기업 제품은 의무구매 비율이 5%에 달하고, 법으로 구매를 강제하지 않는 사회적기업 생산품도 권장 구매비율이 3%나 된다.
애초에 장애인 생산품의 의무구매비율이 낮은데다, 구매기관들이 실적을 중복 보고하는 꼼수를 부려 더욱 중증장애인 재활시설을 어렵게 한다. 가령 기관이 ‘사회적기업으로 지정된 여성기업’의 제품을 구매하면 고용노동부(사회적기업)와 중소기업청(여성기업) 실적으로 잡혀 이중 혜택을 받는다. 우선구매제도 시행 부처가 다른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한국장애인개발원 관계자는 “기관들이 한 가지 제품으로 실적 돌려막기를 하는 것은 우선구매제도 도입 때부터 이어진 꼼수”라고 전했다.
하지만 중증장애인 직업훈련을 겸하는 생산업체는 기업법인이 아닌 복지시설로 분류돼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받지 못한다. 고용부는 2014년 10월부터 직업재활시설 같은 비영리법인ㆍ단체의 사업단이 별도 법인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사회적기업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수익성이 낮은 직업재활시설은 독립이 쉽지 않아 지금까지 사회적기업 인증을 따낸 시설은 단 한 곳에 그치고 있다. 수제 빵을 생산하는 B 직업재활시설 원장 최모(56)씨는 “공공기관에서 구매를 문의하면서 항상 ‘사회적기업도 되느냐’는 질문부터 한다”며 “중복 인증 제품이 아니라고 하면 연락이 안 오는 답답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정부도 이런 상황을 알지만 손을 놓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기관들이 중복 인증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는 사회적기업 여부만 확인하기 때문에 조건에 부합하면 실적으로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전문가들은 중증장애인은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생산성과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만큼 이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혜경 한국장애인개발원 정책연구실 팀장은 “1%뿐인 중증장애인생산품 의무구매 비율도 강제사항은 아니어서 실제 구매 규모는 훨씬 적을 것”이라며 “복지시설인 장애인 생산업체의 특수성을 고려해 다른 기업과는 별도로 강제성 있는 의무구매율을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신혜정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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