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3월 17일
1970년 3월 17일 밤 11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인근 도로에서 정인숙(본명 정금지)이 피살됐다. 26세의 그는 승용차에 탄 채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고, 차를 몰던 그의 오빠 정종욱은 허벅지 관통상을 입은 채 구조됐다. 정인숙에게는 3살 난 아들이 있었다.
한국선 희귀한 총기살인이기도 했지만, 피살자가 제3공화국 실세들의 여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파란을 일으켰다. 그의 가방에서 박정희와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 이후락 주일대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재벌 그룹 회장, 국회의원, 장ㆍ차관 등 26명의 명함이 발견된 사실이 공개되기도 했다. 사건 정황과 배후에 대한 온갖 소문이, 부패 권력의 이미 만연했던 추문들과 더불어 정국을 뒤흔들었다. 박정희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1969년) 직후였고, 71년 대선 직전이었다.
정인숙은 1944년 2월 13일 당시 대구 부시장을 지낸 정도환의 막내로 태어났다. 60년 4ㆍ19로 정도환이 실직했고, 가계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64년 이화여대 영문과 입시 낙방- 이듬해 명지대 사범대 진학…, 그는 대학을 중퇴했다. 그는 미모가 빼어났고, 영어 회화에도 능통했다고 알려져 있다. 방송작가와 영화배우가 되려 한 적도 있었지만 당시 유명 방송작가 장모씨와의 연애 실패 등이 겹쳐 포기했다. 잠시 패션모델로 일하던 그는 고급 요정 접대부가 됐고, 이내 정권과 집권 공화당 권력 실세들의 눈에 들었다. 68년 6월 그는 아들 정성일을 낳았고, 미국 일본 등지로 자주 외유했다.
그는 씀씀이가 헤펐고, 권력과의 각별한 관계를 과시하는 데도 헤펐다고 한다. 그의 그런 행태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정성일의 친부 등 누군가에겐 ‘위험하고 골치 아픈’ 문제였을 것이다.
검찰은 그의 운전기사였던 친오빠 정종욱을 범인으로 기소했다. 소매의 탄환흔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자백이 유일한 범행 증거였다. 범행에 사용된 총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89년 가석방된 그는 방송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자신의 무죄와 총리실 범행설 등을 주장했다.
정인숙 피살 사건은 범인이 누구냐는 형사법적 의문보다 아이의 친부가 누구냐는 사적인 의문과 피살자 사생활, 권력층의 엽색 추문 등으로 물타기 되곤 해왔다. 정인숙은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공원묘지에 묻혔고, 끝내 범행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밝히려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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