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이 등장한다. 감정이라고는 살인의 쾌감만을 지녔다. 경찰은 완력과 교활함과 대범함을 고루 지닌 살인마 한 명을 막지 못한다(스릴러나 공포영화 대부분이 지닌 공식이다). 지적 장애를 지닌 여린 여인이 나선다. 여인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피 칠갑을 한 뒤에야 참혹한 복수극은 끝을 맺는다. 미친 놈에게는 미친 년만이 대적할 수 있다는 해괴한 단순 논리가 스크린을 지배한다. 마음이 불편하다.
영화 ‘몬스터’(2014)와 지난 10일 개봉한 ‘널 기다리며’는 너무나 닮았다. 사이코패스가 등장하고, 희생자의 가족이 이야기의 무게중심을 잡는다.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놓인 20대 여성이 사적 복수에 나선다. 피비린내 가득한 잔혹 스릴러가 충무로의 주류라지만 두 영화를 보면 여러 면으로 반감이 든다. 미래가 기대되던 젊은 여배우 김고은과 심은경을 단선적인 이야기 틀 속에 우겨 넣으며 그들의 재능을 소진시킨다. ‘몬스터’와 ‘널 기다리며’를 보며 가장 못마땅했던 대목이다.
‘몬스터’와 ‘널 기다리며’는 남자들끼리 선과 악을 대변하며 대결을 펼치는 여느 스릴러와 다르다. 힘 없는 여자는 악에 받치거나(‘몬스터’) 정신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상태(‘널 기다리며’)에서 범죄자의 극악을 이겨낸다. 그 과정에서 여자 주인공들은 남자들보다 더 악에 가까워진다.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상투적인 표현은 여자 주인공들에게 더욱 안이하게 적용된다. 이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자신의 완력과 지략을 활용해 살인마와 맞서는 남자 주인공들의 길을 여자 주인공은 가지 못한다. 데뷔작 ‘은교’(2012)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김고은(그는 ‘몬스터’ 이후 ‘차이나타운’에서도 잔혹 연기를 보여줬다)도, 아역시절부터 재능을 인정 받았던 심은경도 예외는 아니다. 여자배우를 보조적이거나 수동적인 역할로 소비해 온 충무로의 편견이 작용했다.
7년 전 심은경이 10대 중반이었을 때 영화인 여럿과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유명 감독은 심은경이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쟤는 정말 연기를 타고 났어. 어른이 되면 어떤 배우가 될지 정말 궁금해.” 잔혹 스릴러에 경도되고, 재능 있는 젊은 여배우를 제대로 활용할 아이디어가 없는 충무로의 현실을 감안하지 못한 예단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