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부가 ‘불가역적’으로 완전히 해결했다는 위안부 문제가 다시 국제문제화하고 있다. 유엔이 위안부를 ‘성노예’로 재규정하고 일본의 미온적 대응을 비판하자 일본 정부가 “극도의 유감”을 표명하며 거세게 반발한 것이다. 유엔의 지적에 대해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11일 한일 간의 합의에 대한 ‘국제적 반응’과 동떨어져 있다고 발끈했다. 하지만 이런 일본의 태도야말로 오늘날 일본이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부인하며 얼마나 외롭게 살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사실 지난해 말 한일 합의 후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속내를 더욱 노골적으로 표출해왔다. 일본 외무성은 이달 초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문서를 홈페이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이 식민지배라는 억압적 환경 속에서 강압과 감언 등 폭력적 수단에 의해 동원되어, 특히 의사에 반하는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일본은 아예 부인하려는 것이다.
어느 학자는 이런 일본을 ‘부인(否認) 선진국’이라 불렀다. 명백한 역사적 명제조차도 어떻게든 비틀어 끝내 부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본의 구미에 맞는 것만을 수용하겠다는 역사수정주의적 욕망이 꿈틀거린다. 자기들이 그리고 싶은 역사에서 다소 불편하거나 불명예스러운 것은 아예 부인하겠다는 유아독존이다. 이런 풍조는 ‘전후 탈각’을 선언한 아베 신조 (安倍晋三)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상당수 일본인들도 단돈 ‘10억엔’으로 ‘골치 아픈’ 위안부 문제를 일거에 털어버린 아베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일본 측이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방법은 해괴하다. 일본 당국이 보관중인 기록에는 총검을 앞세워 위안부를 끌고 갔다는 구체적인 강제의 증거가 없으므로 강제성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강제동원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보다 포괄적인 개념인 강제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논리의 비약, 아니 논리 무시가 공공연히 자행된다. 실증주의의 오류에 빠진 줄도 모른 채 일본 정부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자기중심적으로 호도한 뒤 적반하장 격으로 왜소화한 자기야말로 보편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렇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본말전도에 익숙한 일본의 눈에는 남북한과 중국 등에서 잇달아 보강되고 있는 위안부 관련 기록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피맺힌 목소리조차 강제성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제노사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1937년 난징 학살사건을 희생자 수(중국 30만, 일본 4만)의 다툼으로 둔갑시키고 있듯이,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증거 불충분’으로 치부한 뒤 모든 책임을 부인하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부인(denial)은 외부로부터의 고통이나 불안한 사실을 왜곡되게 자각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는 일종의 무의식의 도착이다. 그 자체가 반(反)이성적이므로 지나친 부인은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외부에 대한 분노와 공격으로 비화할 수 있다. 유엔의 보편적 판단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이는 일본에게서 이런 위험성을 느낀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부인 선진국’ 일본을 거들며 스스로 더 깊은 ‘부인’의 늪에 빠지고 있는 한국이다. 윤병세 외교장관이 2일 유엔 인권이사회 연설에서 전시성폭력을 비판하면서도 위안부 문제를 일절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일본 정부 이상으로 비겁하고 이율배반적이다. 일본이야 부인함으로써 자기도착적인 위안이라도 얻겠지만 한국의 침묵은 국제사회에서 스스로 입지를 좁힐 뿐 아니라 무엇보다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자해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부가 보편적 인권 운운하며 북한 인권문제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부인 바이러스’를 퇴치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위안부 ‘담합’을 통해 스스로 ‘부인’의 족쇄를 채워버린 한국 정부에게는 거의 자정능력이 없어 보인다. 조만간 한일 국장급 협의나 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려 대책을 논의한다지만 이는 ‘부인 동맹국’들 간의 위안부 문제 ‘말살’ 행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시민들이 깨어나 반이성적인 ‘부인 커넥션’을 바로잡는 수밖에 없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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