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직전, 선배에게 습작시를 건네줬었다. 선배는 줄줄이 빨간 펜을 그어댔다. 내뱉는 말도 지청구 일색이었다. 버럭 자존심이 상했지만 계속 듣고 있자니 내 시에 대한 의견이 아닌, 자기 살아온 얘기가 더 많았다. 뜬금없었으나 시에 대한 품평보다 그 얘기들에 더 공감이 갔다. 그러면서 살짝 마음이 풀렸다. 얼마 후, 그 시들을 한 글자도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투고해 당선이 됐다. 선배의 의견을 수긍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내 선에서 손대고 반영할 수 있는 맥락이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선배의 ‘고견’은 이후 다른 방식으로 잔향을 남기면서 오래 영향을 끼쳤다. 당시, 내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이 무엇인지 선배는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그 말을 아낀 것 아니었을까. 이편에서 미리 듣고 싶은 답과 나누고 싶은 감정을 암시하면 할수록 상대가 제시할 수 있는 답은 더 미뤄지고 에둘러진다는 법칙을 그때 깨달았다. 당장 듣고 싶은 말, 한시적인 위안으로 잠깐이나마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말의 효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더 깊숙이 채워줄 수 없는 것이라면 스스로 상처와 결락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게 더 근본적인 애정의 조언일 것이다. 누군가 답을 달라는 말에 나도 선배처럼 응대했었다. 매도나 무시라 여겼는지 모르겠다. 고백컨대, 너무 답을 주고 싶어 그랬던 거라고 이제는 말해야겠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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