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와 마지막 대국을 마친 이세돌 9단은 바둑계 대표적 ‘멘탈갑’으로 꼽힌다. 초반 충격적인 3연패 속에서도 기자회견장에 나와 묵묵히 소감을 전한 그는 패배로 끝난 마지막 대국까지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내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요”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이세돌은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청년이다. 자신감을 동력 삼아 맞붙은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결’을 통해 그는 겸양과 겸손까지 갖춘 모습으로 한국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기자회견에서 전한 그의 발언들을 통해 지난 5차례의 대국을 돌아봤다.
1국 : “진다고 생각 안 했는데 너무 놀랐다”
인간 최고의 바둑기사 이 9단이 알파고에 충격패를 당하고 꺼낸 첫 마디는 “진다고 생각 안 했는데 너무 놀랐다”였다. 이 9단은 지난 9일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제1국에서 흑을 잡고 186수 만에 불계패 한 뒤 착잡한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내 잠시 웃음을 터뜨린 뒤 이같이 말했다. 이 9단은 “바둑 면에서 이야기하면, 초반의 실패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한다”며 “이렇게 바둑을 둘 줄 몰랐다”고 돌아봤다. 대국 전까지 승리를 자신했지만 일격을 당했지만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 측에 “깊은 존경심을 전한다”며 얼굴 없는 승자를 치켜세웠다.
2국 :“이제는 할 말이 없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
10일 열린 2국에서 충격의 3연패를 당한 이세돌 9단은 “놀란 것은 어제 충분히 놀랐고, 이제는 할 말이 없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며 말문을 열었다. “내용상 완패였다”며 패배를 인정한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조금도, 한 순간도 앞섰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패착을 짚어내지 못한 부분에 대해 “어제(9일)는 (알파고의 수에)이상한 점이 있지 않나 했는데, 오늘은 알파고가 완벽한 대국을 펼쳤다”며 알파고의 계산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약점을 못 찾아서 두 번 다 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3국 승리에 대한 희망의 끈도 놓지 않았다. 3국 대결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그는 “대국 중반 이전에 승부를 가려야만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이 좀 올라갈 것 같다”고 내다보기도 했다.
3국 : “이세돌이 졌을 뿐 인간의 패배는 아니다”
12일 알파고와의 3번째 대결마저 승리를 내주며 3연패를 기록, 패배를 확정한 이세돌 9단은 “일단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겠다”면서 “내용이나 승패 등에서 기대를 많이 하셨을 텐데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고 반성했다. 이 9단은 이어 “이렇게 심한 압박감, 부담감을 느낀 적이 없는데 그걸 이겨내기에는 제 능력이 부족했다”고 털어놓으면서도 “이세돌이 졌을 뿐 인간의 패배는 아니다”며 자신의 패배가 인류의 패배로 비춰지는 걸 경계했다.
그는 또 “결과론적으로 따지면 1국은 다시 돌아가도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결코 대결을 포기하진 않았다. 이 9단은 “(알파고가)굉장히 놀라운 프로그램이지만 아직은 완벽히 신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다”며 “분명히 약점은 있는 것 같다. 1, 2국에서도 조금씩 약점을 보였다”고 밝혔다.
4국 : “5국은 흑으로 이겨보고 싶다” 깜짝 제안
3연패 뒤 열린 4국에서 감격의 첫 승을 거둔 13일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이 9단은 “정말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1승”이라며 이날 승리의 가치를 전했다.
“한 판을 이겼는데 이렇게 축하 받은 건 처음인 것 같다”며 웃어 보인 이 9단은 “많은 격려 덕분에 한판이라도 이긴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3연패의 충격에 대해 묻자 “충격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대국을 중단시킬만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밝히며 “이번 한판 이겨서 스트레스도 많이 날아갔다”고 밝혔다.
인터뷰의 백미는 구글을 향한 ‘깜짝 제안’이었다. 이 9단은 “4국을 백으로 이겼기 때문에 마지막에 흑으로 이겨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대국 규칙 상 백을 잡은 쪽에 7.5집을 덤으로 주기 때문에 흑을 잡게 될 이 9단이 다소 불리할 터였다. 이 9단의 승부사 기질이 또 한 번 발휘된 순간이다. 데미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최고경영자)는 이 9단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5국 : “원 없이 즐겼다…더 노력하고 발전하겠다”
30대에 접어들며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단 평가를 받아왔던 이 9단은 15일 ‘세기의 대결’ 최종 5국을 마치면서 ‘노력’과 ‘발전’을 이야기했다. 마지막 대국에서 아쉽게 패하며 1승4패의 전적을 안게 된 그는 “굉장히 아쉽다”고 소감을 밝히며 “더 열심히 노력해 발전하는 이세돌의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는데 결국 해내지 못해서 아쉽다"고 입을 연 그는 “초반에 사실 유리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럼에도 패한 것은 저의 부족함 때문이었다”며 “저의 부족함이 다시 한 번 드러난 경기였다”고 돌아봤다.
이 9단은 알파고의 능력에 대해 “아직은 인간이 대결해 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하면서도 틀을 깬 수를 뒀던 알파고가 준 깨우침도 함께 전했다. “알파고를 보며 기존의 수법에 의문이 들었다”고 밝힌 그는 “앞으로 조금 더 연구해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이 9단은 마지막 소감으로 이번 ‘세기의 대결’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재산을 소개했다.
“바둑을 즐기는 게 기본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바둑을 즐기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번 대국은 원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