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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파마 부대와 권력자들

입력
2016.03.1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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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마 부대 주제에!”

지난해 여름 새누리당 남성 의원은 여성 공천 확대를 요구한 여성 의원들을 면전에서 이렇게 불렀다. ‘끼리끼리 몰려 다니기나 하는 나이 든 여자들이 무슨 정치…’라는 저열한 멸시였다. 여성 국회의원이 이런 대접을 받을진대, XY 염색체가 금수저 스펙이 되는 부조리를 차라리 자연법칙으로 받아 들이고 사는 게 속 편하겠다 싶을 때가 있다.

세상을 바꾸려면 정치 권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힘 없는 무명의 소수자들이 떼지어 악쓰는 식의 투쟁을 주류는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권력을 획득한 소수자 대표들이 정체성을 잊지 않고 책임을 다할 때 소수자 집단은 보다 빨리 억압과 차별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여성들은 “우리를, 소수자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라”는 임무를 맡기고 여성 정치 지망생들을 국회로 들여 보냈다. 여성 의원들은 배려 받았다. 17대 총선에서 도입된 비례대표 의원 절반 여성 의무 할당제와 지역별 여성 후보 우선 추천제 같은 장치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최상위 권력자가 됐다. 의식과 자질이 의심스러운 이들도 있었지만, 머릿수의 힘을 쌓고 보는 게 먼저이니 눈 감자 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가 권력을 개인의 성취로 여기고 배신했다. 금배지가 양성 평등과 인류의 진보에 헌신한 이들이 쥐어준 소명이자 빚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스스로 강자가 됐다는 착각에 빠져 법안도 열심히 내지 않고 목소리도 힘껏 높이지 않았다. 적지 않은 이가 ‘나를 위한 권력’을 지키려 주류 남성에 아첨하고 가부장적 권력 질서에 의탁했다. 파마 부대라 불리는 집단 모욕을 당하고도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못한 게 당연했다.

“여성 개인이 짊어진 짐을 모두가 함께 나누기 위한 사회적 합의의 책임은 정치에 있다. 없는 길을 만들며 무수히 눈물을 삼켰던 주인공이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다.” 여성ㆍ고졸ㆍ호남 출신이라는 ‘흙수저 3종 세트’를 스스로 극복한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의 총선 출마 선언문은 그래서 카타르시스였다.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아는 여성 정치 권력이 드디어 등장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왜 소수자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가를 물을 때마다 여성 의원들은 강변했다. “여자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힘을 쏟으면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받을 수 없는 게 게임의 법칙이다. 우리가 정치판에서 살아 남는 것이 여성 모두의 승리다. 숫자가 늘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숫자가 그렇게 결정적인가. 여성들이 가진 권력의 총량이 열쇠라면, 국회의원 300명을 압도하는 여성 대통령이 나왔는데도 대한민국은 왜 유리천장 지수ㆍ남녀 임금 격차에서 세계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17대 국회 이후 여성들의 삶은 과연 나아졌는가. 결국 여성 정치인의 수적 성공이 여성 개개인의 행복을 보장할 것이라는 가설은 허약해졌다. “나의 권력 재창출이 너희들의 미래”라는 그들의 말은 기만적 합리화 또는 공주병이다.

그러니 이제 전략을 바꿀 때가 됐다. 여의도의 작동 원리를 보건대, 정말로 힘이 센 것은 여성 의원들의 정수나 선수가 아닌 오늘 권력을 가진 이들의 자각과 외침과 행동이다. 가문의 영광이 아닌 사회의 진보를 위해 싸우고 기꺼이 희생하겠다고 약속하는 이, 권력을 우리의 행복으로 바꾸는 감수성과 지혜를 지닌 이, 주류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연대 능력을 갖춘 이를 엄격하게 골라 국회로 보내야 한다.

“고통 받는 여성 소수자들의 눈물과 열망으로 이 자리에 섰다는 것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합니다. 4년 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싸운 뒤 권력의 바통을 넘기겠습니다.” 20대 국회의원 등원식에서 이렇게 선서하는 용감한 여성을 볼 수 있다면, 그 때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최문선 정치부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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