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딸애가 물었다. “성냥팔이 소녀의 이름은 뭐였어요?” 무심코 “없는 것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딸애의 입이 삐죽 튀어나온다. “세상에 이름이 없는 아이가 어디 있어요?” 맞다. 세상에 이름이 없는 아이는 없다. 나는 얼른 정정했다. “그래. 이름이 있었겠지만.” 이상하게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우리가 모르는 거였네. 동화 속에는 나오지 않으니까.”
딸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인터넷에서 한번 찾아봐 달라고 한다. 안데르센 전집을 탈탈 뒤져도 찾을 수 없는 소녀의 이름이 인터넷의 바다에서 발견될 리 없겠지만, 나는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우리와 같은 궁금증을 가진 이들이 또 있었는지 비슷한 질문들이 검색된다. 대답은 한결 같다. ‘성냥팔이 소녀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안데르센이 불우했던 모친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모티프 삼아 창작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작가 역시 행복하지만은 않은 유년기를 보냈고 그 경험과 정서가 작품들마다에 다양한 방식으로 녹아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밤, 꽁꽁 언 몸으로 하염없이 거리를 헤매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성냥팔이 소녀. 그런데 소녀는 고아가 아니었다. 집이 있었고 그 집에는 아버지도 있었다. 소녀가 성냥을 팔아 돈을 벌지 못하면 혼을 내는 주정뱅이 아버지였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이 슬프고 아름다운 동화의 주인공은 아동학대의 희생자인 셈이다.
우리는 며칠 전 한 소년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소년의 이름은 원영이었다. 신원영. 아이를 찾는다는 공개수배 전단에는 소년의 얼굴 사진이 실려 있었다. 또래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나는 그 까만 눈망울을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 원영이를 데리고 밤길을 나섰다가 잃어버렸다는 아이 새어머니의 초기 진술을 믿고 싶었다. 누군가 지나다 쓰러져있는 원영이를 발견하곤 집에 데려가서 잘 보살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의 결말은 선량한 동화의 끝과는 달랐다. 소년은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인 제 집에서 모진 학대를 받다 죽음에 이르렀다. 아이가 죽기 전 3개월 동안 욕실에 갇혀 살았다는 기사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반사적으로 한 소설이 떠올랐다.
오틸리 바이의 ‘벽장 속의 아이’는 프랑스에서 실제 일어났던 아동학대 사건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다섯살 소년 장은 오줌을 가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새아버지와 친모에 의해 9개월 간 벽장 속에 갇혀 살았다. 어른들은 소년이 ‘방해’가 되는 물건이라고 여겼다. 친모는 처음에는 남편이 없을 때면 아이를 잠시 벽장 속에서 꺼내준다. 그러다 점차 벽장 속의 소년을 잊어 간다. 소설은 어린 소년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그 잔혹한 시간을 증언한다. 어둠에 대한 공포와 함께 장을 지배하는 감정은 엄마에게 마저 완전히 버려졌다는 처절한 절망감이다. 아이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웃의 신고 덕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꼭 걸어 잠근 대문 속에서, 방문 속에서, 벽장 속에서 숨죽여 떨고 있는 아이들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참하게 만든다.
성냥 한 개비로 만들어낸 가엾은 환상 속에서 얼어 죽은 성냥팔이 소녀의 꿈이, 설마 성냥팔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소녀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을 것이다. 소녀에게는 좋아하는 색깔과 좋아하는 노래와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물어봐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그 작은 소녀를 그저 ‘성냥팔이’였다고만 기억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아니 우리가 이름을 묻지 않고 지나친 성냥팔이 소녀들이 있는가. 그 작은 소녀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작가의 뜻은 어쩌면 거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늦게야 원영이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미안함을 가눌 길이 없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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