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왕’이라 불린 황제가 있었다. 특유의 쌀쌀맞은 표정으로, 옆에 서면 찬바람이 불 정도라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 윤진, 18세기 중엽 청나라 제5대 황제 옹정제다. 강희제는 왜 10여명이 넘는 황자들 중에서 유독 인기도 없고, 차갑기 그지없는 윤진을 차기 황제로 낙점했을까.
사실 중국 대륙의 지도를 완성하고 태평성대를 연 성군으로 추앙 받는 강희제의 가장 큰 고민도 후계자 선정이었다. 강희는 당초 둘째 윤잉을 황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그릇이 아님을 깨닫고 신하들에게 ‘누가 황태자 감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여덟째 윤사를 제왕의 자질을 갖췄다며 한 입으로 칭송했으나 강희는 애써 모른척했다. 그리고 숨이 멎는 순간, 고명지신(顧命之臣)들에게 유지를 전했다. 강희가 윤사를 내친 이유는 신하들의 ‘지지’로 제위에 오르면 그들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간파한 것이다.
냉면왕 옹정제는 1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재위기간에 그쳤지만 부패를 일소하고, 국고(國庫)를 10배 이상 늘려 놓고, 건륭제에게 바통을 넘겼다. 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반부패개혁의 모델로 삼는 이유다.
이달 27일 예정된 통합체육회 출범을 앞두고 언뜻 냉면왕이 떠올랐다.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국생체)로 양분돼 있던 체육계가 통합된다.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스포츠강국으로서 위상을 굳혔지만 선수를 길러내는 시스템은 여전히 후진적이다. 올림픽 금메달은 엘리트 선수에게만 집중 투자한 결과다. 그래서 동호인 중심의 생활체육과 괴리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 메이저 국제대회 개최 경험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프라 또한 남 부럽지 않는 수준이지만 역설적으로 엘리트 스타가 더 이상 나오기 힘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이다. 과거처럼 운동만 해서는 생계유지조차 버거운 사회구조 때문이다.
현재의 스타들은 거의 학교수업을 전폐하고 운동에 올인해서 정상에 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문한 탓인지, 공부와 운동 다 잘했지만 운동으로 인생행로를 정했다라는 스토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운동은 1등 이외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시스템 탓이 크다. 그래서 국가대표로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기타 선수들은 졸업 후 갈 곳이 마땅찮다. 심지어 국제대회 메달리스트들도 연금만으론 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이다. 실제 지난해 7월에는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숨지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 학교현장 곳곳에서 운동에만 전업하겠다고 손을 드는 학생이 없어 팀을 해체해야 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 간 한국 체육 전체가 무너질 것이란 위기감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체육회 통합에 대한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관할 종목은 같은데 대한체육회와 국생체 2개 조직으로 나눠져 있다 보니 혈세로 지원되는 예산낭비 요인도 컸던 게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통합체육회 출범으로 선수 저변 확대, 생활체육 활성화에 따른 체육 일자리 증대 등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요컨대 엘리트 위주의 스포츠 강국에서 생활체육인이 중심이 되는 스포츠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기반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통합체육회가 과연 한국 스포츠의 백년대계를 위한 밑그림과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다. 최근 대한야구협회 수장의 기금전용 의혹과 수영연맹 간부의 기금 횡령 등 비리가 터져 나와 눈살을 찌푸렸다. 나머지 체육단체들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다.
그런 점에서 통합체육회장은 냉면왕이 돼야 한다. 과거처럼 50여명에 불과한 대의원 세몰이로 선출해서는 안된다. 다행스럽게도 1,500명 규모의 회장선출기구를 통해 뽑는 방식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냉면왕처럼 차가운 머리를 지닌 이가 통합체육회 거대 살림을 맡아 사심 없이 이끌어 가야 한다. 일신의 명성을 위해, 혹은 흘러간 인물들이 자리에‘군침’을 흘려서는 안된다.
최형철 스포츠부장 hcc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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