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동에서 해장국에 소주 한 병 시켜 놓고 돌아가신 이상수(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장) 선생과 밤새 얘기했어, 가만히 있으면 유물들 진짜 큰일난다고. 술김에 ‘뭐라도 하자’고 약속한 게 지금까지 온 거지.”
40년 전만 해도 국내 고고학계에서는 보존과학이란 말이 생소한 개념이었다. 보존 환경이 열악한 탓에 발굴해 놓고도 부식과 파손이 심해지는 유물이 부지기수였다. 그때 보존과학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오희(68) 전 한국전통문화대 석좌교수는 1975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 도쿄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금속유물 보존처리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다. 귀국 후 그가 만든 보존기술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의 전신이다. 이 전 교수는 계명대 연구원,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장 등을 지내며 보존과학의 지평을 넓혀 왔다.
이 전 교수는 최근 서울 종로구의 고미술 갤러리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이난영 선생(당시 경주박물관장)이 없었으면 40주년은 올해가 아니라 더 나중 일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선생이 일본말을 배우라 하더니, 나를 일본에 유학 보내겠다고 지원금도 따왔어. 그때 담당자가 ‘과학자들한테만 지원금 지급이 가능하다’고 거절했는데 ‘이제라도 과학이 돼야 한다’고 엄청 설득을 한 거야.”
연구실 청소도 마다하지 않고, 작업에 끼워 주지 않는 일본 연구원들에게 항의도 해가며 이 전 교수는 1년간 보존처리 기술을 배웠다. 그런데 귀국 후 배치된 곳은 예전에 근무했던 유물과 그대로였다. 그보다 1년 먼저 대만고궁박물관에서 도자기 보존처리를 배워 온 이상수 전 실장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보존과학 배워왔는데 엉뚱한 일만 시키는 거야. 둘이 해장국에 소주 한 잔 하다가 ‘이렇게는 안되겠다’한 거지.”
둘은 고고학과에서 유물정리실로 사용하기 위해 점 찍어둔 사무실에 무작정 자리를 틀었다. 상사의 승낙도 받지 않고 책상을 옮긴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다”고 할 행동이었지만 다행히 최순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사무실 사용 허가는 물론 장비 마련을 위한 특별 예산까지 따내 줬다. 중앙박물관 보존과학이 시작됐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기존 연구자들이 갖고 있던 선입견도 만만치 않은 장벽이었다. “당시에는 유물에 흙이나 녹이 어느 정도 묻어 있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생각했거든. 그래서 불필요한 이물질을 제거하는데도 엄청 거부감을 보이더라고”. 이 전 교수가 작업할 때면 “제대로 하고 있는 것 맞냐”고 따지는 연구자도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몇 년 지나니까 서로 해달라고 찾아오더라”며 웃었다.
이 전 교수는 지난 40년을 돌이키며 이제는 “나처럼 맨땅에 헤딩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라면서도 “머리(보존처리와 유물에 대한 지식), 가슴(유물에 대한 애정), 손(기술)을 다 갖춰야 생명력 있는 보존처리가 가능하단 걸 늘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은별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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