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측에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이번에 제가 백으로 이겼으니 (마지막 대국은) 흑을 잡고 이겨보고 싶다.”
마침내 인공지능(AI)을 상대로 값진 1승을 따낸 이세돌 9단이 마지막 경기에서 흑을 잡겠다는 ‘깜짝 제안’을 했다. 다시 승부사 기질을 찾은 그의 선전포고였다. 규칙 대로라면 5국에선 ‘돌 가리기’로 다시 색을 가려야 한다. 이 9단이 백돌을 한 움큼 쥐어 바둑판에 내려놓으면 알파고를 대신해 수를 놓는 아자 황 구글 프로그래머가 돌의 수가 홀인지 짝인지 맞추는데, 여기서 맞출 경우 돌의 색을 바꾸고 못 맞추면 그대로 간다. 이번 대국은 백을 잡는 쪽에게 7.5집의 덤을 주고 시작하는 중국식 규칙을 따르는 만큼 보통 기사들은 백을 선호한다. 이 9단이 오히려 흑을 잡고 싶다고 밝힌 것은 그 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이 9단은 13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의 네 번째 대국에서 승리한 뒤 오후 6시15분 국내외 취재진이 기다리는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섰다. 3연패로 끝난 전날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확 바뀐 회견장에서는 이 9단이 등장하자 뜨거운 박수 갈채와 환호가 쏟아졌다. 일부 기자와 바둑계 관계자들은 마치 사전에 입을 맞춘 듯 “이세돌! 이세돌!”을 외쳤다. 이 9단은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하사비스 최고경영자(CEO), 데이비드 실버 수석연구원과 나란히 무대 위에 올라 “감사하다”고 운을 뗀 뒤 “한 판 이겼는데 이렇게 축하 받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고 멋쩍어 했다.
이번 승리로 그는 그 동안의 아픔도 모두 씻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 9단은 “(3연패의) 충격이 아예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국을 중단할 만큼 내상이 크지는 않았다”며 “너무 즐겁게 바둑을 뒀고 이번 판 승리로 스트레스도 다 날아갔다”고 환하게 웃었다.
이 9단은 이날 첫 승의 공을 응원해 준 팬들에게 돌렸다. 그는 “이번 대국을 시작하기 전에 5대 0, 4대 1 승리를 낙관했었는데, (그 말처럼) 내가 3대 1로 앞서고 있다면 한 판을 진 것이 아팠을 것 같다”며 “오히려 3연패를 당한 다음 1승을 하니까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많이 응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오늘 한 판이라도 이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겸손해 했다.
전날 이 9단의 패배로 이번 대국의 최종 승리가 알파고에 돌아가자 바둑계에서는 사전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가 제기됐다. 알파고는 21년동안 프로 생활을 한 이 9단의 모든 기보를 익힌 반면 이 9단이 대국 전 접한 알파고의 기보는 지난 1월 구글 딥마인드가 ‘네이처’에 논문을 실으면서 공개한 판 후이 2단과의 기보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 9단은 “알파고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갖고 있었는지는 큰 문제가 아니다”며 “정보가 있었다면 (대국을 풀어가기가) 조금 더 수월할 수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제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고 오히려 자신을 탓했다.
이미 최종 승패가 결정된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이 9단에게 구글측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사비스 CEO는 “이 9단은 창의적인 천재”라며 “이 9단은 앞서 세 번의 연패에도 훌륭한 경기를 펼쳐 어마어마한 바둑 기사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평가했다.
이서희기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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