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알파고가 이세돌 9단에게 둔 '신의 한 수'에 전국이 술렁였다.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대국을 관람한 몇몇 네티즌은 "바둑도 컴퓨터에 지배당하게 될 것 같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한국 바둑의 흥행부진이 민망할 정도로 대국에 대한 열기는 뜨겁다.
'컴퓨터와 인간의 대결'이라는 타이틀이 매혹적이기도 하지만 이 같은 현상엔 최근 1~2년간 흥행한 국내 드라마, 영화의 입김도 무시할 수는 없다. tvN '미생', '응답하라 1988' 등을 통해 바둑에 대한 이미지가 좀 더 따뜻하고 친근해졌다. 우리네 삶을 축약한 듯한 대사는 바둑을 고리타분한 스포츠가 아닌 공감 요소 충만한 감성 스포츠로 바꿔놨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지켜보며 작품 속 바둑 관련 대사를 새삼 돌아봤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지나쳤다면 상식을 새롭게 다진 후 대국 관람을 즐겨보면 어떨까.
1. "택이 국수전 이겼대?" "국수전? (먹는) 이 국수? 으하하"
최근 종영한 tvN '응답하라 1988'에서 쌍문동 이웃들은 '국수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동네 천재 바둑기사 최택(박보검 분)의 경기 결과를 놓고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극중 대국 때마다 신문 1면에 최택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 국수전의 인기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최택을 스타로 만들어준 국수전은 어떤 대회일까.
'국수전'(國手戰)은 1956년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가는 대한민국 최초의 바둑 기전이다. '국수'(國手)는 전국에서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을 지칭한다. 첫 개최 당시 '국수 제1위전'으로 명했으나 제 11기부터 '국수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최택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이창호 9단은 1990년대 인기를 끈 프로기사다. 국수전 결승에서만 무려 10번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2005년 제6회 농심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중국기사 3명, 일본기사 2명을 꺾는 '기적의 5연승' 신화를 쓰기도 했는데, 이 일화는 '응답하라 1988'에서 최택이 성장하는 계기로 활용됐다.
2. "바둑엔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tvN '미생' 극중 오상식 과장(이성민 분)은 신입사원 안영이(강소라 분)가 아닌 장그래(임시완 분)가 영업3팀으로 배치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 종일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던 그는 늦은 오후 장그래를 옥상으로 불러냈다. 긴장한 장그래에게 오 과장은 독설이 아닌 격려를 건넸다. "이왕 들어왔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것이 이기는 곳이야. 버틴다는 것은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석양이 지는 도심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내뱉는 이 말은 직장인의 공감을 사면서 '미생'의 대표적인 명대사로 남았다.
'미생'(未生)은 바둑판에서 집이나 대마가 아직 완전하게 살아있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반대로 '완생'(完生)은 반상(바둑판 위)의 돌이나 집이 완전히 살아있는 형태, '독립된 두 눈'을 확보한 상태를 일컫는다. '독립된 두 눈'은 완생의 최소 조건으로 돌이 무리로 존재하고, 그 무리가 독립된 두 개의 눈(상대방의 착수가 금지된 자리)을 갖고 있을 때를 말한다.
3. "대마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영화 '신의 한 수'에는 교도소에서 휴가를 걸고 조폭 두목과 교도소장이 내기 바둑을 두는 모습이 그려진다. 승세가 교도소장 쪽으로 기울고 있을 무렵 멀리 앉아있던 죄수 태석(정우성 분)이 나선다. 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돌 몇 개로 형세를 뒤집고 이 같은 명대사를 남긴다. 해당 장면은 이후 태석의 복수를 암시하는 복선으로 작용했다.
바둑계에서 '대마'(大馬)는 여러 개의 돌로 넓게 자리를 잡은 모습을 일컫는다. 덩어리가 큰 만큼 여러 방법을 모색할 수 있어 쉽게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사자성어의 형태로 널리 쓰인다. '대마불사'는 경제용어로 자주 활용되는데, 대기업 등 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는 그룹은 위기가 오면 정부가 공적 자금을 투여해 죽지 않도록 나선다는 의미다.
이소라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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