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경찰학개론 外 과목 대체로 겹쳐
50명 뽑는데 지원자 1694명 몰렷
순경시험 준비생도 “도미노 우려”
“‘괴물’들이 몰려 온다.”
9일 서울 신림동에 있는 한 경찰간부 후보생 준비 학원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지난해 12월 치러진 경찰간부 필기시험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신 준비생들은 복도에 삼삼오오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이 말하는 ‘괴물’은 사법시험에 도전했다가 경찰간부 시험으로 돌아선 응시자들. 올해 간부후보 시험 재도전에 나선 장모(29)씨는 “경찰간부 시험도 선발 인원이 적다 보니 ‘고시’로 불릴 만큼 경쟁이 치열한데 사시 준비생까지 합류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시 폐지 논란 여파가 경찰간부와 경찰공무원(순경) 수험생 사회를 흔들고 있다. 법무부가 사시 폐지 4년 유예 입장을 밝혔지만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아 내년부터는 사시가 없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 이에 따라 사시 준비생들은 사시와 시험 과목이 비슷한 경찰간부 후보생 시험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경찰을 꿈꾸던 수험생들은 가뜩이나 높은 경쟁률이 더 치열해지지 않을까 맘 졸이게 됐다.
경찰간부 시험은 사시와 시험 과목이 상당 부분 겹쳐 시험 유턴족들에게 매력적인 대상으로 꼽힌다. 일반직 경찰간부는 1차에서 한국사와 형법 행정학 경찰학개론 객관식 시험을 치른다. 2차에선 형사소송법이 필수고 행정법 경제학 민법총칙 형사정책 중 한 과목을 선택하도록 돼 있다. 이 가운데 형법 민법 형사소송법 등은 사시를 준비했다면 크게 낯설지 않은 과목이라 한국사와 경찰학개론에만 집중하면 되는 셈이다.
2년간 사시에 매달린 최모(27)씨도 지난달 마지막 사시 1차 시험을 치른 뒤 가채점 결과가 좋지 않자 일찌감치 경찰 간부 준비로 선회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은 꿈도 못 꾸고 사시 존치 여부도 불확실해 경찰간부 시험에 도전할 생각”이라며 “시험 과목도 사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 한결 부담이 덜하다”고 말했다.
실제 경찰간부 시험 경쟁률은 점차 오르는 추세다. 50명을 선발하는 시험 응시 인원은 2012년 1,050명에서 2016년도엔 1,694명으로 증가했다. 경찰간부 학원 관계자는 “몇 개월 전부터 경찰간부 시험 과목을 문의하는 사시 준비생들이 부쩍 많아졌다”며 “신림동이 그간 ‘사시의 메카’로 불렸으나 경찰간부 학원이 자리를 대신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사시 폐지 파장은 간부 준비생뿐 아니라 순경 시험에도 미치고 있다. 응시자격 요건만 갖추면 두 시험 모두 지원이 가능하고 간부 시험과 달리 전부 객관식이어서 좀 더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일 경찰공무원 1차 시험을 앞둔 황모(26)씨는 “경찰간부 시험 경쟁률이 높아지면 그 중 일부가 경찰공무원으로 방향을 틀 것”이라며 “결국 사시 폐지의 최대 피해자는 순경시험 준비생”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직군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단순히 합격만을 노린 진로 변경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박상진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합격 가능성만 따지면 법 공부를 많이 한 사시생들이 유리할 수도 있지만 사명감 없이 덜컥 시험에 붙었다가 정작 경찰관이 된 이후 현장에서 느끼는 괴리감이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허경주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