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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올드보이여 GPS를 달자

입력
2016.03.0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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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바람 앞에 촛불이던 20세기 초, 슬픈 조선이 아니어도 세계는 온통 혼란스러웠다. 세계를 제패한 유럽도 예외는 아니어서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됐고, 계급 간의 마찰도 심각했다. 이 혼돈의 시대에 혜안을 보여준 이가 아인슈타인이다. 그의 상대성이론은 물리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이 인간 사냥을 멈추고, 다른 종교와 인종을 인정하는 상대적 세계관을 갖추는 데에도 기여했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꿈꾸던 이 노학자의 원숙한 이미지는, 어처구니없게, 내게 커다란 오해 하나를 심어주었다.

나이 먹는 일이 즐거웠다. 적어도 마흔 살까지, 내게 세월은 보약 같은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거추장스런 욕망에서도 좀 풀려나고, 인격적으로도 성숙해질 것만 같았다. 아인슈타인의 해맑은 웃음은 그런 믿음에 오해를 더했다. 오십이 넘은 지금 내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욕망은 줄지 않았고, 인격도 좀처럼 성숙해지지 않았다. 세월은 공평하게 나이를 나누어 줄 뿐 내 인격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인격은 오로지 내가 돌봐야 하는 것임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요즘은 노욕(老慾)이 걱정이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가 있다. 편집증은 중년 이후 많이 나타나는데, ‘자아에 대한 집착’이 지속되면서, 논리적 체계적 망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종의 인격 장애인데, 나이가 들면 뼈가 굳듯 생각이 굳는 것도 원인일 게다. 사는 일이 조심스러워진다.

아인슈타인을 불러낸 건 내 길동무 내비게이션 때문이다. 길눈이 어두운 내게는 매우 고마운 친구다. 내비게이션은 위치확인시스템(GPS)으로 작동되는데, GPS는 인공위성과 전파를 주고받아 거리를 계산하고 이를 통해 내 차의 위치를 알아낸다. 그런데 차의 정확한 위치를 알자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물체가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다른데, 우주의 인공위성과 도로 위의 승용차는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와 땅에서 시간 차이가 생긴다. 이 차이를 보정하지 않으면, 차들은 길을 잃고 도로는 엉망이 될 것이다. 끊임없이 시간 보정을 받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이 휘어져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한반도라는 같은 공간에 살지만, 각자 어떤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시간은 달리 흐른다. 그걸 관점이라고 하든 뭐라 하든. 우리는 근대문화를 일본제국주의를 통해 받아들였고, 해방 후에는 좌우 이념의 대립을 통해서 사회와 역사를 인식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일본제국주의와 이념의 시간’을 통해 왜곡되었음을 암시한다. 법, 교육, 철학 심지어 우리 전통까지.

교육부가 친일인명사전의 학교 배포를 중지시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산탄처럼 쏟아진다. 국정교과서와 테러방지법에서는 완전한 독재를 향한 부푼 꿈이 느껴진다. 해방 후 제대로 교정되지 못한 시간 속에서 대한민국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시민혁명의 전통이 일천한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고 보정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올드보이들이 두려운 까닭이다. 일본제국주의 모자를 눌러쓴 채 유교와 농경적 사유에 익숙한 이들은 이념의 날을 세워 사사건건 파당을 짓는다. 국민 덕에 재벌이 산 것이 아니라 재벌 덕에 국민이 사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

내비게이션을 따라 지방도로를 달리다 보면, 더럭 겁날 때가 있다. 악의적인 누가 GPS를 장악하여 사람들을 바다로 몰아버리지는 않을까? 깜깜한 밤중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차들을 상상하며 흠칫 놀라기도 한다. 청와대 국회 사법부 미디어를 장악한 올드보이들. 편집증에 시달리는 누군가 나라의 GPS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늘이 무너져도 권력을 내놓을 수 없다면, 당신들의 사유를 보정할 GPS라도 달았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슬픈 대한민국.

이상현 한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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