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열릴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설 공화당 대표 후보 경쟁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실망스럽다. 공화당 지도층은 트럼프가 민주당 후보로 유력한 힐러리 클린턴에게 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까 봐 더 크게 걱정하고 있다. 심지어 일각에선 트럼프를 잠재적인 미국판 무솔리니로 보기까지 한다.
문제가 어떤 것이든 지금의 미국은 1922년의 이탈리아와 다르다. 공정한 사법 제도, 헌법의 제도적 견제와 균형은 리얼리티 TV쇼 주인공(도널드 트럼프)에게도 제약을 가할 것이다. 진짜 위험한 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자신이 했던 말을 실행에 옮길지도 모른다는 게 아니라 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하는 말들이 피해를 낳는다는 점이다.
지도자는 자신의 결정에 따른 결과만으로 평가 받는 게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만들어내고 가르치는 의미를 통해서 평가 받기도 한다. 대부분의 지도자는 지지 그룹의 기존 정체성과 결속에 호소함으로써 지지 기반을 얻는다. 하지만 위대한 지도자는 지지자들에게 소속 그룹 너머의 세계를 가르친다.
독일이 70년 사이 세 번째로 프랑스를 침공했던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지도자 장 모네는 패전국 독일에 복수하면 또 다른 비극이 생길 것이라 확신했다. 대신 그는 훗날 유럽연합(EU)으로 진화하게 되는 기구의 점진적 발전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EU가 생기면서 전쟁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됐다.
뛰어난 지도력을 보인 다른 예로는 넬슨 만델라가 있다. 그는 자신의 지지 그룹을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으로 정의한 뒤 수십년간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를 실시하고 자신을 투옥시킨 부당한 처사에 복수할 수도 있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지지자들의 정체성을 확장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만델라의 이런 노력을 보여주는 유명한 상징적 제스처가 있다. 럭비 경기에서 남아공 대표팀 스프링복의 유니폼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그 전까지 이 팀은 남아공에서 백인의 우월함을 상징했다. 지지자들에게 확장된 정체성을 가르치려 한 만델라의 노력과 인접국 짐바브웨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의 편협한 접근 방식을 비교해보라. 만델라와 다르게 무가베는 지지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식민지 시절 품었던 분노를 이용했다. 그리고 지금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있고 실업률은 4.9%로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에선 이러한 번영에서 소외돼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이들은 지난 수십년간 커지고 있는 불평등이 기술발전 때문이 아니라 외국인들 탓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민과 세계화를 반대하는 집회를 규합하기는 쉬운 일이다. 이런 경제분야 포퓰리즘과 함께 전체 인구 중 두드러지는 소수집단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라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변화는 새로운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음 대통령은 미국의 많은 이들이 위협적이라고 느끼는 세계화 과정에 어떻게 대응할지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국가적 정체성은 상상의 공동체다. 한 나라 안에서도 다른 국민의 경험을 직접 체험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난 한두 세기 동안 민족 국가(nation-state)는 국민이 국가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상상의 공동체였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애국을 최우선 의무로 여겼다. 그것을 피할 순 없지만 세계화되고 있는 세상에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세계화의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마을, 지역, 국가, 지구 등 다양한 상상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 이는 인터넷과 값싼 여행에 의해 유지되는 영역과 중첩된다. 현재 난민의 대량 탈출문제는 수많은 나라의 국경들과 연결되고 있다. 변호사 같은 전문직 단체는 초국가적 기준을 갖고 있다. 환경운동가부터 테러리스트까지 활동가 그룹의 범위도 국경을 초월해 연결돼 있다. 주권은 더 이상 과거처럼 절대적이지 않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4년 르완다 대학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점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가 미군 부대를 보내려 했다면 의회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을 것이다. 오늘날 훌륭한 지도자는 세계주의적 성향과 자신을 뽑아준 국민에 대한 전통적인 의무 사이에 붙잡히곤 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여름 난민 위기에 대해 용감한 리더십을 발휘한 이후 깨달은 것처럼.
사람들이 주로 국가 공동체에만 속한 세계에서는 순수한 세계주의적인 이상은 현실적이지 않다. 이민 수용에 대해 폭넓게 퍼져 있는 반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전세계 사람들의 소득을 공평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얘기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지도자가 세계적으로 가난과 질병을 줄이기 위해 더 많은 걸 해야 하고 궁핍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건 지지자들을 교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말은 중요한 힘을 지녔다. 철학자 콰메 앤서니 애피아는 이렇게 말했다. “(십계명 중)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은 합격-불합격이 결정되는 시험과 같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율은 약간씩의 변화를 인정한다.” 세계주의와 국가주의 대립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미 대선 후보들이 보호무역과 이민, 세계의 공중 보건, 기후 변화, 국제적 협력 등의 이슈와 씨름하는 걸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미국적 정체성의 어떤 측면에 호소하려 하는지 물어야 할 것이고 지지자들에게 더 큰 의미들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미국인의 정체성을 최대한 확장하려 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자신들의 편협한 이익에만 호소하고 있는가.
트럼프는 이슬람교도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멕시코에게 불법 이민을 막을 장벽을 세우는 데 돈을 내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이런 제안이 실제 정책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가 제안한 것 중 상당수는 시행을 위해 계획된 정책이 아니라 미국의 한 부분인 편협한 포퓰리스트 경향에 호소하도록 고안된 슬로건일 뿐이다.
트럼프에겐 이데올로기적으로 강력한 핵심이 없다. 그는 ‘협상의 기술’을 자화자찬할 뿐이다. 자기 도취에 빠져 있긴 하지만 이 모든 걸 고려해볼 때 트럼프가 실용적 대통령이 된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지도자는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도록 돕는다. 그 점에 관해서 트럼프는 이미 실패했다.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ㆍ국제정치학
번역=고경석기자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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