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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전쟁고아 대부 딘 헤스와 보낸 5개월

입력
2016.03.0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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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턴의 공군대학원(AFIT)에서 안식년을 보내던 2009년 5월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딘 헤스 예비역 대령을 처음 만났다. 92세 고령에도 건강했던 그와 근 5개월간 매주 일요일 조찬을 함께 하며 한국전 경험담을 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시 유럽전역에서 300회 이상 전투출격한 베테랑조종사였던 그는 1950년 한국전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한국군 조종사양성부대인 제6146부대장으로 부임했다. 한국공군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북한 침략군을 막기 위한 전투출격도 250여 회나 기록했다. 불과 1년도 못 되는 재임 기간에 그의 휘하 10명의 교관조종사 중 7명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상황을 겪었다. 1인 다역인 그를 미 공군에선 ‘1인공군(One Man Air Force)’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6146부대는 전황에 따라 사천 진해 김포 여의도 평양 대전 다시 여의도로 이동하면서 한국 조종사들의 비행훈련과 전투임무를 병행했다. 특히 진해 시절, 미 제25사단의 지원요청으로 하루에 12회나 전투 출격하는 대기록도 남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아껴 관저로 자주 불러 전황을 경청했다.

그와 고아들과의 첫 인연은 서울 수복 후 여의도 기지로 이동해 중령으로 진급했을 즈음이었다. 부대주변으로 모여드는 전쟁고아들을 위해 대형 천막 수용시설을 만들고 보살폈다. 부족한 군수물자가 동이 나 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이들을 서울의 중앙고아시설로 보냈다. 후에 이는 제5공군고아원이 되었고 사령부 산하 모든 부대가 이 고아들의 구호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이후 유엔군의 북진에 따라 6146부대도 평양북단으로 이동해 압록강변에서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으나,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당장 1,000여명으로 불어난 고아들을 안전한 제주도로 긴급 호송하는 일이 시급했다. 사령부에 요청한 C-54 수송기 15대가 곡절 끝에 기적처럼 김포상공에 나타나 고아들을 제주도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제주도의 한국보육원은 그 수용인원에 비해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 많은 고아들에게 신길 신발도 겨우 200켤레밖에 없었다. 며칠 후 뜻밖에도 300달러가 모금되자 일본에서 600켤레의 신발을 구입해왔다. 한국군 조종사 대령의 월급이 겨우 8달러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부대 내에 목로주점을 열어 주당 수익금 500~1,000달러씩을 고아원으로 지원했다. 고아들을 위한 자선사업이라고 알려지면서 한잔에 5 센트하는 술 한 잔 마시고는 달러지폐들을 기부하는 장병들이 많았다.

전쟁 초기 한국공군에 대한 유엔군의 신뢰는 매우 낮았다. 하지만 점차 조종사 수가 늘어나고 전투기량과 정비기술이 향상되면서 신뢰도 커졌다. 전투기도 F-51 무스탕을 75대나 보유하게 되면서 유엔군도 한국공군의 충분한 능력을 인정하고 중요한 단독 작전임무들을 부여하게 됐다. 1951년 5월 하순 대구의 미5공군사령관으로부터 한국공군의 훈련 상황이 완벽하니,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음 날 제주도로 날아가 부대원들과 고아원에 작별을 고할 때는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더라고 했다.

그는 귀국 후에도 한국과 한국 전쟁고아들을 돕는 일에 헌신했다. 1956년 자서전 ‘전송가(Battle Hymn)’를 출판했다. 이 책은 영화로도 제작돼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출판과 영화 수익금 전액은 제주도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미 NBC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서 한국 고아들을 위한 구호품들이 쇄도하기도 했다. 당시 텍사스의 농부가 젖소 20마리를 기증해 이를 C-130 수송기에 실어 제주도 고아원에 전달한 일도 있었다. 지원사업과 함께 그는 6살 한국고아를 직접 입양해 키우기도 했다.

헤스 대령은 태동기 한국공군의 발전을 결정적으로 돕고 한국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전쟁영웅이자,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보살핀 지극한 휴머니스트였다. 마침 지난 3일은 그의 일주기였다. 다시 그의 명복을 빈다.

홍성표 아주대 NCW(Network Centric Warfare)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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