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88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뒤늦은 대관식이었다. 디캐프리오는 이미 다종다양한 역할을 하며 제 몫을 하는 배우로 평가 받았다. 골든글로브상 남우주연상만 세 차례 수상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3번 올랐고, 한 차례 남우조연상 후보가 됐다. 출연한 영화의 인지도와 감독의 유명세 덕을 봤다는 평가도 따랐으나 그를 연기 못하는 배우로 낙인 찍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카데미를 노리고 연기한 것 아니냐는 비아냥(‘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 출연했을 때 특히 많이 받았다)은 어쩌면 그의 준수한 외모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됐을지 모른다. 17세에 영화 데뷔해 23세에 ‘타이타닉’으로 세상의 왕임을 선언했던 그는 42세에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며 진정 모두 다 가진 남자가 됐다. 빛나는 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그의 출연작 5개를 돌아봤다.
토탈 이클립스(1996)
막 스크린의 별이 된 배우의 예상 밖 행보였다. 감독은 폴란드 출신 아그네츠카 홀란드였고, 영화 규모는 작았다. 내용도 문예적 기운이 가득했다. 19세기를 풍미한 프랑스 시인 폴 베르렌느(데이빗 듈리스)와 요절 천재시인 아르튀르 랭보(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금지된 사랑을 그렸다. 유명 시인이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 버릴 수 없는 것이 많았던 베르렌느가 랭보의 재능과 외모에 반해 격정에 휩싸이게 되는 과정이 스크린을 채운다. 22세의 디캐프리오는 상업적 성공에만 전념하기 바쁠 때 동구권 출신 예술영화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연기 지향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재능을 불꽃 삼아 삶을 금세 연소시켰던 랭보의 뜨거운 인생이 디캐프리오의 몸을 빌려 스크린에 부활한다. 디캐프리오가 오스카 트로피를 손에 쥐기 위해 마틴 스콜세이지 영화에 출연했다는 오해를 불식시킬 만한 영화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
할리우드의 이단아 쿠엔틴 타란티노와 첫 호흡을 맞춘 영화다. 미끈한 얼굴을 무기로 근사한 역할만 해도 아무 문제없을 디캐프리오는 악마의 기운을 지닌 악역 캔디를 연기한다. 흑인들을 단지 노동을 위한 짐승이나 자신의 유희를 위한 장난감 정도로 여기는 미국 남부 농장주 캔디는 백인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를 대변한다. 흑인 노예 출신 현상금 사냥꾼 장고(제이미 폭스)와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치면서도 하나의 게임으로 연기는 캔디의 모습이 극적 긴장감을 빚어낸다. 캔디가 해골을 톱으로 자르는 장면이 있는데 너무 흥분한 나머지 손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른다. 디캐프리오는 시나리오에도 없었던 캔디의 모습을 현장에서 만들어내며 영화 속 명장면 중 하나를 연출해낸다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
결혼 생활의 이중성을 다룬 영화다. 프랭크(디캐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즐릿)은 첫만남에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뉴욕 교외에 신혼 집을 차린다. 두 사람은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가고 모든 것을 버리고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새 출발하려 한다. 하지만 프랭크는 직장을 그만두려 할 때 승진 소식을 듣게 되고 아내와 내린 결정을 뒤집으려 한다. 가정의 희생을 발판으로 사회적 야망을 현실로 만들어가려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남자와,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싶은 여자의 갈등과 사랑이 섬세하게 그려진 영화다. ‘타아타닉’으로 사랑의 낭만을 스크린에 구현했던 두 배우가 결혼 뒤 찾아오는 사랑의 환멸을 그려낸 점이 흥미롭다. 윈즐릿의 남편이었고, ‘007 스카이폴’(2012)과 ‘007 스펙터’(2015)의 감독 샘 멘데스가 연출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2006)
1990년대 후반 아프리카 국가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배경으로 다이아몬드 생산과 관련된 비극을 전하는 영화다. 다이아몬드광산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솔로몬은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발견하고 이를 소년병으로 끌려간 아들을 구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려 한다. 솔로몬이 다이아몬드를 감춘 사실을 안 용병 아처(디캐프리오)는 솔로몬의 다이아몬드를 죽음의 대륙 아프리카를 탈출한 기회로 삼으려 한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 도우며 광산을 벗어나게 된 솔로몬과 아처를 민병대원들이 뒤쫓고 절망 어린 삶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두 사람의 안간힘도 더욱 세진다. 디캐프리오는 이젠 지도상에서 사라진 아프리카 로디지아 출신 백인을 연기하며 뿌리 잃은 유민의 고독과 아픔을 스크린에 심는다. 총격을 당한 뒤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아처는 디캐프리오 연기로 더욱 돋보인다. ‘가을의 전설’로 유명한 에드워드 즈윅 감독.
제이. 에드가(2011)
미 연방수사국(FBI)를 설립하고 죽을 때까지 FBI 수장으로서의 삶을 살다간 인물 존 에드가 후버의 삶을 그린 전기영화다. 후버는 48년 동안 FBI를 지휘하는 매우 드문 삶을 살은 유명인으로 사생활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배우 출신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후버의 베일 속 삶을 들춰내려 한다. 디캐프리오는 후버를 맡아 FBI 수장으로 죽은 한 사내의 기행과 게이로서의 면모를 묘사한다. 미국에서는 꽤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영화이나 한국에서는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개봉조차 못했다. 청춘 스타 출신 디캐프리오가 어둠 속 실존 인물을 연기하고 게이로서 등장한다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알려졌다. 주문형비디오(VOD)로 만날 수 있다. 의미 있는 내용, 좋은 감독이면 흔쾌히 출연 결정을 내리는 디캐프리오의 면모를 가늠할 수 있는 영화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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