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ㆍ이순희 옮김
사회평론 발행ㆍ284쪽ㆍ1만2,000원
엔첸스베르거의 판옵티콘
한스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지음ㆍ원성철 옮김
오롯 발행ㆍ224쪽ㆍ1만3,500원
개인 취향이긴 합니다만, 책면 담당자로서 늘 아쉬운 게 에세이입니다. 알록달록 뽀샤시한 감성을 자랑하는 감상문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꽤나 심각한 주제, 공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경험과 성찰과 독서가 한데 어우러진, 때론 간간히 곁들인 유머도 빛나는 책을 말합니다.
버트런드 러셀의‘결혼과 도덕’(사회평론 발행)이 눈에 띄었을 때, 그래서 참 반가웠습니다. 이 능구렁이 같은 할아버지는 ‘뭐 이런 얘기쯤이야’하는, 시치미 뚝 뗀 표정으로 희한한 농담을 툭툭 던져대기에 이번엔 또 얼마나 기발하고 엉뚱한 얘기를 할까,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니까요.
미안하지만, 이번 책은 생각만큼 재밌진 않았습니다. 자격미달이란 소린 아닙니다. 이 책이 나온 게 1929년입니다. 연애와 결혼과 이혼 등의 문제를 다루는데, 지금 봐도 낡았단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오늘날 ‘꼰대들’보다 훨씬 나은 얘기를 들려주다 보니, 한 인간이 지닌 합리적 사고능력은 시대를 건너뛸 수도 있겠구나 싶은 감탄이 나옵니다. 물론, 당대에야 이 책 때문에 모 대학 스카우트 제안이 취소됐다고 합니다만.
그럼에도 러셀의 매력이 최고도에 달하는 건 역시 은근한 목소리로 칸트 따윌 어릴 적 배운 교훈이나 만지작거리는 좀 유치한 철학자로 깔아뭉개고, 헤겔 정도야 프로이센 제국의 3류 어용학자쯤으로 취급해버릴 때인 것 같습니다. 모두가 대단하다 칭송하는 독일 관념철학을 이렇게 막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될까요.
의외로 낄낄대며 읽어댄 에세이는 ‘엔첸스베르거의 판옵티콘’입니다. 네, 바로 그 관념철학의 본거지 독일의 작가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가 썼습니다. 판옵티콘이라 해서 제레미 벤담, 미셸 푸코를 떠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1935년 독일 희극작가가 기괴한 도구와 기이한 사진을 모은 전시관을 만들면서 ‘판옵티콘’이라 이름 지었다는 데서 따왔습니다. 우리 말로 풀자면 ‘만화경’ 정도 되려나요. 책엔 20편의 에세이가 실렸습니다.
1929년생인 이 작가의 입담도 보통이 아닙니다. ‘책상 위에서 국가를 발명하는 법’이란 글에선 낭만적 민족주의에서 비롯되는 국가관을 제대로 비웃어줍니다. ‘투명함의 음험함’이란 글에서는 모든 정보를 다 검색해볼 수 있는, 비밀이 없는 이 인터넷 시대에 정작 투명성이야 말로 가장 음란해졌다고 한탄합니다. 이 음란하게 투명한 세상에서 “어렵사리 쟁취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정보의 자유의 역기능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말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정보기관들의 행태를 꼬집은 ‘우주적 기밀’이란 글은 꼭 추천 드립니다. 괴벨스가 속일 수 없는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면, FBI 설립자 에드거 후버는 “협박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엔첸스베르거는 바닥에 착 달라붙어 잘 안 보이고, 걸을 때마다 조심해야 하고, 길거리 여기저기 붙어있는 것처럼 세상에 참 많이도 존재하며,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남는다는 점을 들어 정보기관을 ‘껌딱지’와 똑같다고 야유합니다. 그러고 보니 계속 낄낄댄 건, 어째 러셀보다 글을 잘 써서만은 아닌 것 같네요.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