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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식의 세상만사] 필리버스터란 진풍경

입력
2016.03.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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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yshwang@hankookilbo.com/

막말ㆍ폭력 대신한 항변의 힘

더민주 야권 주도권 과시무대

국민의 당 가장자리로 밀어내

정치판에 새 볼거리가 등장했다. 국회선진화법(2012년 개정 국회법) 제106조의 2에 규정된 ‘무제한 토론’이다. 오랫동안 본고장인 미국의 예에 따라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로 불렸고, 지금도 자주 혼용된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 상정한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막기 위해 야당이 꺼내 들었다. 직권상정과 무제한 토론이라는 두 비상수단의 정면충돌만으로도 눈길이 갔다.

진짜 볼거리는 따로 있었다. 38명의 의원이 연달아 장장 192시간 25분의 본회의 발언을 이었다. 2일 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12시간 31분의 ‘대기록’을 세우기까지 역대 최장발언 기록이 잇따라 세워졌다. 정치는 말로 하고 토론은 정치 기본기라지만, 그것도 시간과 형식 나름이다. 서로 두런두런 주고 받는 이야기도 아니고, 그 오랜 시간을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발언을 이어가려면 초인적 의지가 필요하다. 필리버스터 릴레이 주자들은 정말 대단했다. 망외(望外) 소득도 컸다. 주말에도 본회의장 방청석이 가득 차고, 국회방송의 1일 시청률도 평소의 20배 수준인 0.28% 수준으로 치솟았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SNS)에 관련 정보와 의견이 넘친 것은 물론이다. 야당이 오랜만에 국민 관심을 누렸고, ‘필리버스터 스타’도 여럿 배출했다.

야당만 즐거운 잔치판이 아니었다. 막말과 멱살잡이가 판치고, 대형해머를 휘둘러 회의실 문을 부수던 막장 국회와는 너무 다른 ‘선진 국회’의 모습이었다. 정치와 유권자의 직접소통의 장이 활짝 열렸다. 국민은 본회의 참관이나 각종 매체를 통한 구경에 그치지 않고, 발언 의원과 정당에 발언자료를 보내어 읽게 하는 적극적 참여도 연출했다. 참여와 소통의 선순환이 정치 감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온 나라가 국회 발 진풍경에 정신이 팔린 듯하던 인상과 달리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 반응은 미지근했다. 평소 여야 각각의 성향을 담은 이야기로 제법 서로 목소리를 높였던 것과 달리 대개는 아무런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식이나 건강, 북한, 나라경제, TV드라마가 여전한 화제였다. 잠시 관심을 보인 친구들도 아주 소극적으로 찬반이 갈렸다. 나름대로 한국사회의 전문가 그룹에 속하는 이들의 눈에 필리버스터 정국은 슬쩍 보고 지나칠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그토록 직권상정을 꺼리던 정 의장의 선택이니 마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뒤늦게 필리버스터를 통해 테러방지법의 핵심 쟁점이 대중에 알려졌다지만, 실은 여야 사이에는 2001년 법안의 첫 발의 이래 오랜 줄다리기가 이뤄졌다. 최대 쟁점인 국정원의 임의적 개인정보 접근 우려는 통신비밀보호법 등 다른 법안 심의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걸러졌다. ‘국정원의 인권침해’ 우려에 대한 국민의 전통적 경각심을 모를 리 없는 여당이 4ㆍ13 총선을 앞둔 미묘한 때에 집착과 의욕을 드러냈으니, 일부 우려나 반대는 불가피해도 다수 국민의 이해는 얻었다는 판단이 섰던 셈이다.

더민주 지도부의 종결 선택은 무엇보다 뚜렷한 증거다. 정치적 소통의 잔치판, 환호와 박수가 쏟아진 무대를 왜 이리 서둘러 걷었을까. 관객과 합일하는 예술적 감동에 몸을 떤 ‘필리버스터 스타’들과 달리 더민주 지도부는 냉철했다. 정치적 손익 계산과 전략적 판단이 끝난 뒤였다. 얻을 것은 기대이상으로 얻었고, 앞으로는 잃을 게 더 많은 일은 그만둬야 했다.

필리버스터 종결 방침이 공개된 후 곧바로 김종인 더민주 비대위 대표가 던진 ‘야권통합’ 제안에서 필리버스터의 성격이 분명해졌다. 야권 내 주도권 확보를 위해 국민의 당을 향해 겨눈 칼날이었다는. 국민의당과 정의당 의원들도 무대에 올랐지만 기획과 연출 등은 어디까지나 더민주의 몫이었다. 이로써 오랜 골칫거리인 국민의당과의 주도권 다툼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했고, 제2막인 ‘야권통합’제안으로 국민의당을 아예 뿌리째 흔들고 있다. 더민주 지도부의 무서움에 소스라치는 한편 선뜻 무대에 따라 오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허술함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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