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를 하다가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몇 년 지난 문학 계간지였다. 먼지와 습기가 범벅되어 페이지가 여러 겹 맞붙은 채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와인을 마시다 흘렸는지 한쪽 모서리는 적갈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냥 버리려고 하다가 호기심이 당겨 몇 장 훑어보았다. 소설가 B의 단편이 실려 있었다. 읽다 보니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됐다. B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는다는 자각과 함께 소설 스타일이 조금 변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반 정도 읽어나가던 참이었다. 문득 양쪽 면이 습기로 달라붙은 페이지가 나왔다. 도저히 뗄 수 없을 만큼 빳빳하게 말라 있었다. 그래서 중간 부분 두 페이지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전 페이지의 마지막 대목과 그 후 페이지의 첫 대목이 기묘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장면 전개도 문장 맥락도 딱히 흠 잡을만한 부분이 없었다. 나름 반전이랄 수도 있는 대목이었으나 붕 떠버린 사이의 공백이 별문제 없어 보였다. 끝까지 읽고 나서도 이야기의 마디가 부실하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B가 의도했을 리는 없었다. 책장에서 B의 단편집을 꺼내 보니 그 작품이 있었다. 잡지에서 사라진 부분을 찾아보려다가 말았다. 대신, 읽을 수 없게 된 중간 부분을 상상해봤다. B의 작의와는 무관하게 혼자 다시 써보는 소설. 그건 오로지 나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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