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졌다. 해맑은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영화 ‘널 기다리며’(10일 개봉) 속 심은경은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커다란 돌로 덩치 큰 남자를 제압하고, 칼을 들이밀며 연쇄살인범을 압박한다. 때론 무표정하게 때론 격정에 젖어 오랜 복수 계획을 하나하나 실행하는 모습이 낯설고도 낯설다. 20대의 몸으로 돌아간 70대 할머니의 감격(영화 ‘수상한 그녀’)도, 왕을 순정으로 대하는 무구한 무수리(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모습도 찾을 수 없다. 형사 아버지를 살인마에 잃고 정신적 성장은 멈춘 뒤 복수심만 키워온 20대 여인 희주는 심은경의 새 경지를 보여준다. 윤제문, 김성오 등 남자 선배들에 밀리지 않는 기운을 보여주며 단독 주연으로서 제 몫을 해낸다. 3일 오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심은경은 첫 스릴러 영화가 남긴 후유증 탓인지 진지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영화를 처음 본 뒤 소감은.
“뭐랄까요. 내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나름 최선을 다해 희주를 표현했는데, 내면이 복잡하고 다양한 면모를 지닌 캐릭터라 어디에 어떻게 초점을 맞출까 고민을 많이 한 역할이다. 연기를 하면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정말 최선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저 내가 진심으로 연기한 모습을 관객들이 잘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나밖에 없다.”
-희주 역할에 도전한 이유는.
“주변 분들에게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을 물었는데 나랑 다른 관점에서 희주를 바라봐서 좀 놀랐다. 희주는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인물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정신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천재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희주가 (자신의 복수계획을 숨기기 위해) 덜 떨어진 척 연기하는 것으로 보더라. 시나리오에서는 희주의 순수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영화 ‘렛미인’을 떠올리면 좋을 듯하다. ‘렛미인’의 주인공들은 사람을 죽이는 등 정당하지 못한 일을 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볼 때 마음이 너무 아프고 동정이 간다. 희주를 그렇게 그리고 싶었다. 선악을 떠나서 가련하고 순수하고, 잘못된 방식인줄 모르고, 내가 정의다 생각하면 그렇게 행동하는 인물로 묘사하려 했다. 그런 모습이 섬뜩하리라 생각했다. 최선을 다했으나 그렇게 그려지지 못했다. 나의 부족함도 있었고….”
-스릴러를 하고 싶었다고 하던데.
“나는 어두운 장르에 관심이 굉장히 많다. 영화를 볼 때도 스릴러, 공포물을 선호한다. 연기적 감정의 진폭이 크고,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으니 한번쯤 해보고 싶었다. 배우는 다양한 장르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배우로서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연기 터닝포인트로 생각하기보다는 이번에는 이런 캐릭터, 이런 장르에 도전해 보자는 생각에 선택했다. 내 연기 인생의 도전 중의 하나, 경험 중의 하나로 봐 주시면 좋겠다.”
-연기하기 어려운 역할이라 출연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렵지 않은 영화는 없다. ‘수상한 그녀’를 촬영할 때도 할머니 역할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나이 먹어 가는 사람의 감정을 연기하면서 조금씩 공감하게 됐다. 희주라는 친구는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는 자신이 있었다. 장르가 스릴러이기도 하고. 코미디는 웃기는 포인트를 살려주면 되고, 스릴러는 감성과 내면 연기가 중요한데 이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희주는 달랐다. 연기적으로 고민을 많이 했다. 이 연기가 맞는 건가 생각하며 촬영했다.”
-다음에도 스릴러에 도전할 생각인가.
“다음에는 정말 제대로 된 선과 악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연기적으로 이번엔 만족한다 할 수 없지만 나를 많이 깨우쳐준 작품이다. 힘겹게 연기를 하고 고민을 하는 것이 또 하나의 단계이구나, 이를 어찌 감당하고 잘 받아들여야 할까 생각 중이다.”
-촬영 주 가장 힘들었을 때는.
“건물 옥상에 걸터앉아 어머니를 멀리서 바라보는 장면을 촬영할 때 고소공포증 때문에 벌벌 떨었다. 안전장치가 돼 있는데도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꾹 참고 연기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주인공으로 거의 혼자 영화를 이끌어 가느라 부담감은 없었나.
“예전에는 좀 더 무모해서 마음이 더 편했던 것 같다. 요즘엔 딜레마가 있다. 내가 어찌 연기하면 좋지, 어떤 게 좋은 연기일까, 뭐가 정답일까, 스스로 묻곤 한다. 쑥스럽지만 13년 동안 연기를 해 오면서 좀 자만했다. 이 정도 했으면 어느 정도 연기에 대해 알겠지, 라고 생각했다. ‘수상한 그녀’도 해냈고. 그런데 이후 놓친 게 많았다.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요즘 한다. 예전에는 앞만 보고 달린 듯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아닌데,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연기는 왜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고 행복하지 않더라. 내가 어렸을 때 연기할 때의 마음가짐을 잊지 못하고 있는데, 뭔가를 열망하고 꿈꿔오고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잊어버리고 산 것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최근에 연기에 대한 부담감을 많이 느끼는 것 같다.”
-부담감이 왜 생겼다고 보나.
“‘수상한 그녀’가 흥행이 매우 잘됐고, 나는 상도 많이 받고 관심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난 뭐든 했다 하면 성공해야 해, 흥행을 해야 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듯하다. 영화 ‘써니’와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성공도 나도 모르게 나를 옭아맨 듯하다. 이런 성공이 나랑 맞지 않는 선택을 하게 만든 듯하다. 드라마 ‘내일은 칸타빌레’는 내가 잘 못했다. 그 드라마를 하고선 내가 너무 욕심만 앞섰구나, 배우로서의 본질을 잊고 있었구나 생각했다. 최근에는 연기가 나의 길이 맞는가 고민도 하게 됐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도 없이 연기만 하게 될 줄 알았고, 정말 최고의 배우가 되고 싶었다. 어느 순간 이렇게 그냥 흘러가는 것은 인간 심은경에게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어떤 결과든 당당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그게 잘하는 것인 줄 모르지만, 그게 또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내일도 칸타빌레’ 때문에 많이 힘들었나 보다.
“힘들었다. 너무 힘들었다. 숨기고 싶지 않다. 이건 뭐지? 라는 혼란에 빠졌었다. 그런데 너무 신기하게도 그런 경험이 약이 되더라. 사람들은 내 ‘흑역사’로 내세우겠지만…. 아직도 그런 말 많이 듣는다. ‘수상한 그녀’로 확 떠서 ‘내일도 칸타빌레’로 폭망했다고. 나도 처음엔 (그 결과를) 많이 회피하려 했다. 처음 경험하는 실패였으니까. ‘연기를 잘했다는 말을 해야지,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어렸기에 했던 생각이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내일도 칸타빌레’의 연기는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다. 왜 그리 잘 보이고 싶었을까,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되는 것을.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이 왜 있는지 알겠더라. 배우로서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됐다.”
-배우로서 고민 상담하는 친구나 선배가 있나.
“하연수? 같은 소속사(매니지먼트AND)인데다 코드가 너무 잘 맞는다. 언니가 ‘은경아 네가 그리 지쳐 있으면 안 된다. 너는 우리 회사의 희망이다’라고 말하면 ‘언니가 우리 희망이다, 광고도 많이 찍고…’ 이런 대화를 나눈다. 서로를 애써 위로하지는 않는데 만나면 서로에게 위안이 많이 된다. 매우 고맙다. 어제도 시사회 와서 ‘영화 손에 땀나게 봤다’고 하더라. 너무 감사했다. 순수하고 착한 언니다. 언니도 영화 촬영 고민 많겠지만 잘 마쳤으면 좋겠다.”
-연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어제 언론시사회 뒤풀이 끝나고 술을 좀 마셨다. 내가 울면서 소속사 대표님에게 ‘정말 저 연기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나도 이유는 모르겠다.”
-연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나.
“많았다. ‘내일도 칸타빌레’ 끝난 직후 그런 생각 많이 했다. 내 나이가 대학 졸업 하고, 나는 어떤 직장을 다녀야 하나, 뭘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할 때다. 연기가 나랑 맞을까, 다른 것 해볼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예전엔 다른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볼 여유도 없이 시간을 보냈다. 학창시절 치마도 줄여보고 반항도 해보고 지낼 걸, 하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그런 게 다 연기에 도움이 되는데, 나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아이였다. 요즘 연기할 때 그런 점이 아쉽다.”
-다음 출연작은 어찌되나.
“영화 ‘걷기왕’이 19일 크랭크인한다. 경보하는 인물을 연기하는데 경보 연습을 딱 한번 했다. 경보에 재능이 있다 해서 경보를 해 볼까 생각도 한다(웃음). 경보 코치님이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해서 더 가르쳐 달라고 매달릴 정도다.”
-‘걷기왕’은 독립영화인데 차기작으로 택한 이유는.
“마냥 해맑은 시나리오라서 좋았다. 청춘을 다루는데 있어 뻔하지 않았다. 꿈을 이룬다는 상투적인 내용이 아니라, ‘너는 그 자체로서 빛난다’고 말하는 내용이라서 좋았다. 제가 맡은 인물 만복은 이름도 너무 귀엽고, 나랑 많이 비슷한 친구라서 연기를 하면 재미있겠다 생각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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