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수해마다 선거를 치르는 미 의회에서 마지막 회기를 일컫는 말이 ‘레임덕 세션(lame-duck session)’이다. 11월 선거가 끝나고 다음해 1월 새 의회가 소집되기 전 열리는 레임덕 세션은 명칭에서부터 처량함과 무기력감이 풍긴다. 추수감사절에서 성탄절에 이르는 축제시즌에, 낙선의원들이 한달 후면 떠나야 하는 의사당에 모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는지.
하지만 레임덕 세션이 꼭 파장 분위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2010년 12월은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가장 왕성했던, 일반 회기 때보다도 더 중요한 정치적 진전을 이뤄냈던 레임덕 세션으로 꼽힌다. 직전 중간선거에서 상하원 모두 참패했던 오바마 행정부는 민주당의 다수당 지위가 유지되는 마지막 회기였던 레임덕 세션에 총력전을 폈고, 공화당과 대타협을 통해 결국 감세연장 법안, 커밍 아웃 동성애자 군복무금지법 폐기안, 전략무기감축협정 비준안 등을 통과시켰다.
이미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거부당한 의원들이 주요 법안에 손을 대는 건 부당한 만큼 레임덕 세션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 대표라면 법이 부여한 임기종료일까지 소임을 다해야 하며, 특히 낙선 의원들은 더 이상 당론이나 지역구 압력, 업계 로비에 얽매이지 않고 양심과 신념에 따라 투표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레임덕 세션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19대 국회가 이제 막을 내린다. 임기는 5월 말이고 현재의 임시국회도 며칠 더 남아있지만, 두 쟁점법안(테러방지법 북한인권법) 처리가 확정됨에 따라 19대 국회의 정치적 임기는 사실상 종료하게 됐다. 새누리당은 잔여 쟁점법안들, 예컨대 서비스기본법과 노동관계법까지도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치일정상 불가능하단 건 자신들도 잘 알 것이다. 총선이 불과 40일 앞인데, 더구나 본선보다 더 피 말리는 예선(공천)이 진행 중인데, 의원들이 ‘한가하게’ 본회의장을 지키고 있을 리 없다.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되는 법안은 1만 건에 달한다. 17대는 약 3,300건, 직전 국회였던 18대에선 6,400건이었는데, 이번 국회는 폐기법안수가 사상 처음으로 네 자릿수에 진입하게 됐다. 국회의원들의 법안 발의가 워낙 활발해진 탓도 있고, 개중엔 의원들이 의정활동홍보 목적으로 낸 전시용 법안들도 적지 않지만, 어쨌든 자동폐기건수가 이렇게 폭증했다는 건 19대 국회가 발의만 해놓고 처리는 하지 못한 반쪽 입법부였음을 입증한다.
4월 총선이 끝나면 아마도 임시국회가 한 차례 소집될 것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한국판 레임덕 세션이다. 18대 때도 총선 후 마지막 국회에서 그간 못다 처리한 법안들을 대거 처리했는데, 한결같이 여야간 별 이견이 없는 법안들이었다. 하지만 19대 레임덕 세션은 좀 뜨겁게 진행됐으면 한다. 일차적으로 임기가 끝나기 전 밀린 숙제들을 마무리해야겠지만, 특별히 이번엔 과거 레임덕 세션 때와 달리 쟁점 법안들을 일부라도 다뤄보길 바란다.
내달 총선이 끝나면 여야모두 상당수 의원들이 물갈이될 것이다. 젊은 낙선의원들은 다음 선거에서 재기를 꿈꾸겠지만, 이번에 아예 정치 일선을 떠날 중진 의원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들에겐 이번 레임덕 세션이 더 이상 당론이나 청와대 혹은 당 지도부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오로지 소신과 철학에 따라 투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아무리 선당후사(先黨後私)가 강조되는 한국정치라지만, 헌법기관으로서 한번쯤은 자기 고유의 양심에 따라 투표해야 하지 않을까. 당론의 장막을 거둬낸다면 서비스기본법에 찬성하는 야당의원, 노동관계법에 반대하는 여당의원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총선 후 의석 분포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20대 국회라고 해서 뭐가 특별히 달라질까 싶다. 대선을 치르는 국회라, 쟁점입법에 관한 한 19대보다 더 무기력할 수도 있다. 통과든 부결이든 19대의 일은 19대에서 매듭짓고 넘어갔으면 한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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