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찾으러 여수 갔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올라올 텐데 조바심을 참지 못했다. 노루귀, 변산바람꽃, 복수초. 사실 그 봄이라는 게 과장을 좀 보태면 손톱보다 작은 것이어서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해도 보일락말락 하다. 봄바람에 스치는 온기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고개를 내민 것들이니 그 정도 수고쯤이야.
돌산읍 끝자락 향일암을 약 5km 앞둔 백포마을에서 봄소식을 전하는 첫번째 전령을 만나기 위해 차를 세웠다. 포구를 낀 마을 뒤편 산자락으로 길을 잡았다. 오리나무 꽃술도 주렁주렁, 매화향기 상큼한 농로를 따라 밭이 끝나는 지점까지 발걸음이 가볍다. 숲이 시작되는 초입이 바로 노루귀 군락지다. 군락지라고해서 온 천지가 꽃밭일거라 기대하면 실망이 크다. 잡목이 우거진 돌무더기 위로 분홍빛 점들이 흩뿌려진 수준이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가녀린 꽃대는 길어야 10cm 미만이고, 하나의 꽃대에 단 한 송이의 꽃을 달고 있다. 바람이 조금만 세져도 금방 스러질 듯한 모습, 그래서 더욱 반갑고 안쓰럽고 사랑스럽다. 잎 모양이 노루의 귀를 닮아 붙은 이름인데, 잎은 온 정성을 쏟은 꽃이 제 목적을 달성한 후에야 나온다.
두번째 전령사는 변산바람꽃, 향일암을 바로 코앞에 둔 지점에서 도로 오른쪽 언덕배기가 군락지다. 야생화 사진을 찍는 이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곳이어서 사진을 찍다가 밟거나 엉덩이로 뭉개지 말 것을 당부하는 안내문도 붙어 있다. 돌무더기 틈새로 톡톡 튀어나온 모습이 앙증맞고도 기품이 넘친다. 사실 꽃잎처럼 보이는 5장의 하얀 이파리는 꽃받침이고, 퇴화한 꽃잎은 암술과 수술의 가장자리에 노랗게 둘러져 있다. 작은 꽃 하나에 흰색과 노랑, 파랑과 연두 빛 작은 우주를 품었다. 여수에서 생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변산바람꽃이 먼저 발견된 건 이곳 돌산인데, 최초로 명명한 식물학자가 부안의 변산반도에서 채집해 발표했기 때문에 변산에 이름을 빼앗겼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돌산바람꽃’으로 불릴 뻔도 한 식물이니 이곳 사람들에게는 더욱 애정이 가는 봄 전령이다.
돌산의 세번째 봄 전령 복수초는 금오산을 중심으로 향일암 맞은 편 율림치 산자락에 모여 터를 잡았다.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어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곳이다. 도로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군락지까지는 오르내린 발길에 자연스레 길이 생겼다. 하얀 눈밭을 뚫고도 솟아나는 복수초라 이미 활짝 펴서 꽃잎 끝이 말린 것부터 초롱처럼 새로 망울을 터트리는 것까지 다양한 개체를 볼 수 있다. 노루귀와 변산바람꽃에 비하면 꽃봉오리가 아주 큰 편이어서 무채색 겨울 숲을 노랗게 물들인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복수초 군락 인근 율림치는 노을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초록 기운 가득한 금성리 들판 너머 섬들에 갇힌 다도해로 노을이 붉게 떨어진다. 장거리 여행으로 쌓인 심신의 피로도 잠시 내려놓는다.
여수=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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