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 무엇을 남겼나

9일 내내 온라인 뜨겁게 달구고
국회 방청석 260석 거의 메워
정치타협 부재의 산물 평가도
“정치적 악용ㆍ남발 말아야” 지적
테러방지법 통과를 막기 위한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보기 위해 국회를 찾은 시민들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을 가득 메운 채 31번째 주자 안민석 의원의 토론을 경청하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테러방지법 본회의 처리를 막기 위해 9일간 이어진 야당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2일 종료됐다. 필리버스터가 남긴 것은 ‘헌정사상 최장’ ‘세계 최장’ 등 단순한 기록만이 아니었다. 여당의 ‘자폭정치’ ‘총선용 공작’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시민들은 열광했다. 온라인은 온통 필리버스터 발언과 뒷얘기로 도배됐다. 본회의장은 텅 비었지만 시민들이 대신 방청석을 가득 채우는 기현상이 나타나는 등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시민들 민주주의를 경험하다

막말 대립과 몸싸움을 일삼던 정치권에 신물 났던 시민들은 필리버스터를 보다 선진적인 민주적 제도로 받아들였다. 국회는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본회의장을 방문하려는 방청객으로 연일 북적였다. 3ㆍ1절을 맞은 1일에도 ‘정치다운 정치’‘즐거운 민주주의’를 보고 느끼기 위해 왔다는 가족ㆍ커플 단위의 방청객이 방청석 260석 중 240석을 채웠다.

1일 오후 1시쯤 필리버스터를 진행 중인 임수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토론을 지켜보던 대학생 김유나(19)씨는 “정치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필리버스터를 지켜 보니 한 편의 축제처럼 느껴졌다”며 “유권자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게 투표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중ㆍ고교생 아들 둘을 데리고 전북 전주에서 올라왔다는 40대 남성은 “테러방지법이 무엇인지 묻는 아이들에게 쉽게 설명해줄 수 없어 직접 국회의원들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용복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쟁이 불거질 때마다 거리로 나가던 관행을 깨고 합법 테두리 안에서 자기 의지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의회정치가 한층 진일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신과 소통의 정치에 긍정 평가

당리당략에 따라 집단행동을 하던 정치인들이 개인 소신을 드러낸 점도 필리버스터가 긍정적 평가를 받은 이유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소신을 갖고 말하는 정치인이 드문 현실에서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여과 없이 바로 들을 수 있었다”며 “특히 박근혜정부의 일방향 소통에 거부감을 가진 국민들이 직설적인 언어를 들으면서 정치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품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필리버스터는 시민의 정치 참여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정희 한국외대 정치학과 교수는 “필리버스터 방청이 급증한 것은 국회가 실제 무슨 일을 하는지 국민의 관심이 커졌다는 방증”이라며 “한국사회는 이슈가 생길 때마다 공론화 과정이 부족했는데 정치권과 국민, 언론 모두 민주적 절차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로 작용했다”고 진단했다.

테러방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46개 시민단체 회원들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야당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지속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고영권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여야 협상 부재의 산물

하지만 이번 필리버스터가 정치권의 타협 부재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선뜻 좋은 평가만 할 수는 없다. 김용복 교수는 “주요 사안을 놓고 대화할 시간이 그토록 많았는데 ‘오죽하면 필리버스터까지 가야 했을까’하는 의문이 남는 것은 사실”이라며 “필리버스터는 여야의 부족한 협상능력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정희 교수 역시 “수십년 만에 등장한 필리버스터가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지만 남발되거나 악용되면 곤란할 것”이라며 “의견이 다르다고 무작정 필리버스터를 일상화하기보다 쟁점을 면밀히 살펴보고 절충안을 만드는 과정에 더욱 힘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 그래도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하고자 하는 여당으로선 국회법 개정의 빌미로 삼을 소지가 있다. 새누리당은 필리버스터가 사전선거운동에 이용됐다며 야당을 비난하고 있다. 김용남 새누리당 대변인은 이날 현안 브리핑에서 “깊은 고민 없이 도입된 제도가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며 2012년 국회법 개정으로 허용된 필리버스터를 문제삼았다.

김현빈기자 hbkim@hankookilbo.com

전혼잎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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