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살생부’의 역사는 짧지 않다. 역대 총선에서 공천혁명을 기치로 다선(多選)의 노회한 중진을 내치는 것은 다반사였고, 주류 계파가 읍참마속하면서 상대 계파 핵심 의원의 낙천을 도모하는 논개 식 낙천 작전도 있었다.
17대 대선이 끝난 이듬해인 2008년 18대 총선에서도 실체 불명의 살생부는 여의도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전파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 직후 강재섭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대표와 정두언 박형준 의원 등 친이계 핵심, 혹은 안강민 공천심사위원장 등을 만났다는 소문이 크게 돈 직후였다. 친이계와 친박계가 공천 경합을 벌이던 서울 강서갑, 부산 사하갑과 서구, 대구 동을ㆍ달서갑, 경기도, 경남 등에 누가 공천될 것이란 리스트가 회자했다. “강남의 P호텔과 강북의 G호텔에서 친이 핵심들이 모여 살생부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18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총선기획단은 이방호 사무총장이 단장을 맡았고, 정병국 홍보기획본부장, 정종복 제1사무부총장, 박순자 여성위원장, 김정훈 원내부대표 등 다수가 활약했다. 친박계는 김학송(전략기획위원장), 송광호(제2사무부총장), 서병수(여의도연구원장) 의원뿐이었다.
여러 버전인 18대 공천 살생부에는 18명의 친박계 의원 이름이 거론된 ‘이재오 리스트’도 있었다. 그에 대항해 당시 친박계 핵심인 김무성 의원(현 새누리당 대표)의 자택에서 ‘친박 공천대책위’가 가동됐고 ‘반드시 공천(A등급)’ ‘가급적 공천(B등급)’ ‘낙천 불가피(C등급)’ 등으로 친박계를 구분해 친이계와 협상을 벌였다는 말도 있었다.
19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은 ‘보이지 않는 손’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현역 의원들을 대상으로 당 지지율과 현역 지지율 비교지수, 타 후보와의 경쟁력지수, 현역 재신임지수를 조사해 ‘하위 25% 컷오프 룰’이 만들어졌고 낙천 리스트가 회자했다. 정두언 의원은 트위터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최재오(최경환=이재오), 권방호(권영세=이방호), 현종복(현기환=정종복)’ 의원을 거론하기도 했다. 살생부 리스트에 오르내렸던 대구의 핵심 중진인 박종근 이해봉 의원은 불출마했다. 당시에도 친이계와 친박계로 성향을 나눈 명단은 SNS를 통해 크게 전파됐다.
서상현기자 lss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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