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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웅이라구요? 그저 속았을 뿐입니다”

입력
2016.02.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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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군인 훈련명목으로 소집

보호장구도 제대로 없이 현장에 투입돼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게든 도망갔을 것”

체르노빌 사고로 강제피난명령이 내려진 마을 제염작업에 동원된 세르게이 살케비치(50)씨가 국가에서 받은 공로증서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무지한 상태에서 현장에 갔다가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며 인터뷰 중간중간 회한의 눈물을 닦아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체르노빌 사고로 강제피난명령이 내려진 마을 제염작업에 동원된 세르게이 살케비치(50)씨가 국가에서 받은 공로증서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무지한 상태에서 현장에 갔다가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며 인터뷰 중간중간 회한의 눈물을 닦아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죽지 않은 영웅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요. 쓸모 없는 장애인일 뿐이죠.”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만난 세르게이 샬케비치(50)씨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스무살이었다. 그는 제대군인 정기훈련 명목으로 소집 당해 강제피난구역에서 6개월간 제염작업을 했다.(체르노빌 원전은 우크라이나에 위치해 있지만 집중 피해지역은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에 걸쳐 있었으며 그 때엔 모두 소련 소속이었다.) 그는 뼈와 생식기질환 고혈압 뇌졸중 등 다양한 병을 얻어 직장마저 잃고 현재까지 통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체르노빌 사고 회고에는 현장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친 영웅담이 빠지지 않는다. 인력 수급이 다급했던 사고 직후 언론은 다른 재난처럼 이들을 대대적으로 조명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제염작업에 강제징집될까 두려워 직장에 휴가를 내고 숨거나 심지어 그만두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샬케비치씨는 회상했다. 평범한 다수의 시민들이 그러했다.

그도 제 발로 사고 현장을 찾아간 경우는 아니었다. 군대에서 2년 의무복무를 마치고, 공공버스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애초 체르노빌에 가서 일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애국심에 호소해서 자원자로만 충원하기에 상황이 너무 긴박했고 인력은 턱없이 모자랐을 것”이라며 “정부는 전략을 바꿔 숨기거나 속이는 방법으로 일할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의 친구 중에는 새벽 2시에 회사에서 큰 일이 생겼다는 호출을 받고 나섰다가 체르노빌로 보내진 사례도 있다.

얼마 안가 살케비치씨는 제대군인을 대상으로 한 정기훈련 통지를 받았다. 소련의 제대군인들은 한국의 예비군 훈련처럼 정기적으로 특정 도시에서 열리는 훈련에 참가할 의무가 있었다. “평범한 통지였어요. 평소처럼 카자흐스탄에 가서 훈련하겠구나 했죠. 소집장소에 가보니 호송대가 끝없이 이어지더라고요. 그때 직감했어요. 아, 카자흐스탄이 아니라 체르노빌이구나.”

목적지가 체르노빌로 예상되는 버스 안에서 그는 긴장감을 떨칠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쉬지 않고 술을 마셔 흥건하게 취했다. “도착하자마자 몇 명은 도망갔어요. 상관은 전과자와 만취자를 골라내고 신체 건강하고 성실한 젊은이들만 남겨 특별임무를 내렸죠. (모범적인 사람만 사고원전에 투입한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그는 동료들과 찍은 흑백사진 몇 장을 테이블에 꺼내놓으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는 너무 어렸어요. 애국심에 고취돼 있었고 남자로서 겁쟁이처럼 보이기 싫었죠.”

25일이라던 작업기간은 3개월, 그리고 다시 6개월로 늘어났다. 이들에게 주어진 특별 임무는 강제피난구역으로 지정된 마을을 집집마다 다니며 제염을 위한 화학약품을 뿌리는 것이었다. 그는 “텅 빈 마을이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나치가 휩쓸고 간 마을들을 연상시켰다”며 “일반병들은 지금은 이름마저 사라져버린 마을에서 장교들은 오염이 덜한 지역의 빈 학교에서 생활했다”고 말했다.

체르노빌 발전소 내 노동자들이 담배를 피우며 휴식시간을 보내고 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체르노빌 발전소 내 노동자들이 담배를 피우며 휴식시간을 보내고 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현장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36명이 한 텐트에서 생활했다. 배급 받는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깨끗한 음식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다. 갈아입을 옷은커녕 방호장구도 제공되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 방사선에 얼마나 노출됐는지 재는 개인선량계가 지급됐지만 요즘 기기처럼 직관적 방식이 아니어서 작업 뒤 수거해가면 다음날 상관을 통해 전체 작업자들의 평균치를 안내 받는 정도였다. 그는 “우리 중 누구도 방사능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며 “팀이 해체된 뒤에는 평균 수치마저도 찾을 수가 없어 피폭량을 가늠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한동안은 피곤과 무력감 외에 별다른 증상은 없었다. 그러나 곧 고혈압, 뇌졸중 등이 차례로 발견됐다. 아들의 장애를 알게 된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게 돼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에서는 마땅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상의료만을 제공했다.

샬케비치씨의 자녀들은 선천적으로 허약하게 태어나 성인이 된 지금도 심한 바깥 활동을 하지 못한다. 이런 자녀들을 앉혀놓고 그는 이제 “무모한 희생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 역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도망갈 것이라고 했다. “체르노빌 영웅을 기리는 노래에 ‘영웅은 죽었다’는 가사가 있어요. 저처럼 죽지 않은 ‘영웅’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요. 쓰고 버려지는 거죠.”

체르노빌 사고 당시 4호기에서 작업하다 그대로 묻힌 직원 와레리 보데무츄크의 묘비. 시신은 4호기 안에 있다고 추정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체르노빌 사고 당시 4호기에서 작업하다 그대로 묻힌 직원 와레리 보데무츄크의 묘비. 시신은 4호기 안에 있다고 추정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그는 취재진에게 후쿠시마 원전 및 제염 노동자들의 처우를 물어왔다. “벨라루스 TV를 통해 본 노동자들은 적절한 보호장구를 갖춘 채 체계적으로 일하고 있더라”며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후쿠시마 노동자들을 향해 한마디 덧붙였다. “영웅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국가를 위한 영웅이 되려다가) 가장 소중한 가족을 지키지 못한 저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체르노빌=김혜경 프리랜서 기자 salutkyeong@gmail.com

다무라 히사노리 프리랜서 기자 hisanori.ymr@hotmail.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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