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억원 대 자산가 최모(71)씨는 지난해 말 솔깃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현금 50억원을 주면 일본 재무성이 발행한 5,000억엔(한화 5조원)짜리 국채를 담보로 제공하겠다. 채권은 바로 현금화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상대방은 부동산에 내놔도 팔리지 않던 경기 안성시 소재 80억원짜리 임야를 시세보다 비싼 120억원에 매입해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당시 지방 요양병원에서 혈액암 투병 중이었던 최씨는 부푼 마음에 아픈 몸을 이끌고 상경했다.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J호텔에서 부동산 업자 송모(59)씨 일당을 만난 최씨는 이들이 내민 채권과 현인증서(채권인증서)를 보고 완전히 속아넘어갔다. 하지만 거래가 성사되기 직전 액면가가 터무니 없이 높은 점을 의심한 최씨 아들의 신고로 사기범들은 현장에 잠입해 있던 경찰에 모두 붙잡혔다.
경찰에 따르면 송씨 일당의 사기행각은 이모(70)씨 덕분에 가능했다. 앞서 최씨 돈을 빌린 적이 있는 송씨는 지난해 7월 최씨가 땅을 내놓은 사실을 알고 그에게 접근했다. 송씨는 한 회사에 근무한 인연이 있는 유씨와 범행을 모의했고, 유씨는 다시 월남전 전우인 이씨를 끌어 들였다. 전과 13범인 이씨가 지난해 11월 자신에게 2013년 7월 홍콩에서 밀반입한 위조 일본채권 15매(75조원 상당)를 보여준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세 사람은 바람잡이 역할을 한 김모(57)씨와 함께 고령과 지병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최씨에게서 거액을 뜯어내기로 의기투합한 뒤 6개월 동안 치밀하게 범죄 시나리오를 짰다.
조사 결과 사기범들이 최씨에게 건넨 채권과 현인증서에는 발행연도가 서로 다르게 표시돼 있었지만 쉽게 판별하기 어려울 만큼 위조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위조 일본 채권을 내세워 현금 50억원을 가로채려 한 혐의(위조유가증권행사 및 사기미수)로 송씨와 유씨를 구속하고 김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28일 밝혔다. 달아난 채권 공급책 이씨는 지명수배됐다. 송씨 등은 경찰 조사에서 “위조채권인지 몰랐고 이씨가 일본에 있는 제3자에게서 받았다고만 들었다”며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 관계자는 “자칫 거액을 날릴 뻔한 피해자 최씨는 아직도 사기꾼 송씨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며 “도주한 이씨에 대해 출국금지하고 나머지 위조 채권의 행방을 찾는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지연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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