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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선이도 따라한 미코 메이크업... 온가족이 즐겨온 국민축제 한마당

입력
2016.02.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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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제1회 미스코리아대회 진 박현옥씨가 1958년에 열린 미스유니버스대회에 참가해 손을 흔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7년 제1회 미스코리아대회 진 박현옥씨가 1958년에 열린 미스유니버스대회에 참가해 손을 흔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달 화제 속에 끝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혜리)은 ‘미스코리아 화장’을 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피켓걸 연습에 나섰다. 눈두덩이를 화려하게 칠하고 볼 터치도 짙게 해 이목구비를 또렷하게 강조한 화장이다. 드라마에서 덕선의 메이크업을 총괄한 박원숙 라뮤제 원장은 “1988~89년 미스코리아대회에 출전한 분들의 사진을 보고 화장법을 참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보면 촌스럽지만, 미스코리아대회에 출전한 이들이 한 화장과 헤어스타일 등이 당시 유행을 이끈 만큼 그 모습을 반영했다는 설명이다.

미스코리아대회는 유행에 민감했던 여성들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응답하라 1988’ 속 덕선이네 식구들처럼 온 가족이 안방에 둘러 앉아 TV를 통해 대회를 지켜보며 즐기던 몇 안 되는 국민 축제이기도 했다.

한국인의 삶과 함께 해 온 미스코리아대회가 올해로 60회를 맞는다. 1957년 시작한 미스코리아대회는 오랜 세월을 이어온 만큼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미인을 뽑는다는 전통을 이어오며 끊임 없이 사회와 소통해왔다.

‘大韓女性(대한여성)의 진선미(眞善美)를 세계(世界)에 자랑할 미스코리아 選拔(선발)’. 대회 첫 회 포스터 문구다. 출범할 때부터 미스코리아는 ‘민간 외교 사절단’으로서 역할이 컸음을 엿볼 수 있다. 미스코리아대회는 세계적 권위의 국제 미인 대회 미스유니버스에 참가할 미의 사절을 뽑기 위해 시작됐다. 국제 교류가 적었던 당시에 미스유니버스는 한국을 밖으로 알릴 수 있는 주요 민간 외교 무대였다. 이 행사에 참석한 미스코리아는 전쟁으로 얼룩진 한국의 어두운 이미지를 씻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1959년 미스코리아 진이었던 오현주씨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인기상 등 4개 부문에서 상을 타 해외에 한국의 밝은 이미지를 심었다. 문화로 한국을 알린 진정한 한류 1세대가 바로 미스코리아였던 셈이다.

민간 외교의 가치가 컸으니 국가의 지원도 적극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미국에서 열릴 미스유니버스대회를 앞두고 당해 미스코리아 진 서현주씨 등을 청와대로 불러 “1등하고 돌아오길 바란다”고 격려하는 등 1960년대엔 미스코리아대회 진선미와 대통령 내외의 접견이 공식화되기도 했다. 창경궁(1962)과 경복궁(1964~66) 등에서 대회가 열리며 국가적 행사로 거듭나기도 했다.

제 1회 미스코리아대회 진 박현옥씨. 국정홍보처 제공
제 1회 미스코리아대회 진 박현옥씨. 국정홍보처 제공
77년 미스코리아 진 김성희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77년 미스코리아 진 김성희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스코리아대회는 단순한 미인 선발 대회를 넘어 국민의 지친 삶을 어루만져주는 행사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금년 23세의 박현옥양이 (단기)4290년 미스코리아로 선발되었다. 오는 7월 11일 미국 롱비치에서 거행될 미스 유니버스에 참가할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좌석은 물론 복도에까지 넘쳐흐르는 수많은 관중과 못 들어가서 앞을 다투는 문밖의 군중들로 일대 혼잡을 이룬 서울 명동 시립극장에서…”(한국일보 1957년 5월20일자 보도).

이처럼 미스코리아대회는 첫 회부터 인산인해일정도로 사람들의 큰 관심 속에 진행됐다. 여성들이 수영복을 입고 무대를 걷는다는 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매우 파격적인 풍경이다. 1972년 16회 대회 때부터 지상파 방송사를 통해 TV로 중계가 시작되면서는 국민 축제로서 확실히 자리 잡았다. 1989년 열린 제33회 대회는 시청률 54%까지 나왔다. 국민 두 명 중 한 명이 미스코리아대회를 생중계로 지켜봤다는 뜻이다. 이젠 스타가 된 배우 오현경을 진으로, 고현정을 선으로 배출한 대회였다. 1980년대 중후반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사회적 분위기가 활기차게 달아오른데다 청년들의 대중문화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던 때라 특히 미스코리아대회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1988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선발된 김성령씨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8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선발된 김성령씨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미스코리아 진 장윤정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미스코리아 진 장윤정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9년 미스코리아대회 선 고현정(맨 왼쪽)과 진 오현경(오른쪽에서 세번째)이 지역 예선인 미스서울 선발대회에서 동료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89년 미스코리아대회 선 고현정(맨 왼쪽)과 진 오현경(오른쪽에서 세번째)이 지역 예선인 미스서울 선발대회에서 동료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여성단체로부터 여성의 성상품화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미스코리아대회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알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 시대의 가장 이상적인 여성을 대표한 미스코리아는 사회 문화적인 여성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단초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복희 전 삼육보건대 피부미용학과 겸임교수는 1980년대 미스코리아의 두터운 화장을 예로 들며 “여성들도 남성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1970년대의 자연스러움과는 달리 화려하면서도 강한 이미지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했다.

미스코리아는 다른 미인대회처럼 여성의 몸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인성에도 비중을 둬 지덕체를 함께 심사기준으로 보고 재원을 선발했기 때문이다. 키 165cm 이상으로 선발 대상을 제한한 슈퍼엘리트모델 선발대회와 가장 큰 차이다. 이로 인해 미스코리아대회는 미인대회 중에서는 여성의 보편성을 가장 많이 담보했다는 평을 받았다. ‘미스코리아가 여성 미의식에 미친 영향’(2012년)이란 논문을 보면 ‘미스 코리아선발대회가 여성에 대한 차별을 부추긴다’는 설문조사 결과 평균 3점에 2.44를 기록, 과반이 그렇지 않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6년 미스코리아 진 이하늬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6년 미스코리아 진 이하늬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덕체를 겸비한 선발에 주력한 만큼 450명의 미스코리아는 사회·문화계 재원을 키워내는 인재 양성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7년 미스코리아 진 김성희씨가 가수로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87년 진 장윤정씨, 88년 진 김성령씨, 92년 미 이승연씨 등이 연예계로 진출 스타로 거듭났다. 1963년 진 김명자씨는 미국 오하이오주 윌리엄팬대학에서 의상학으로 명예박사 학위를 취득해 경원대 의상학과 교수를 지냈고, 2000년 진 금나나씨는 하버드 대 박사(영양학) 출신으로 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진흥상 특별상을 받는 등 과학계에서 인정 받고 있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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