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크리스마스, ‘응답하라 1988’에선 화제의 명장면이 또 하나 탄생했다. 안재홍(이정봉 역)과 이민지(장미옥 역)의 ‘비엔나 커피 키스’ 신이다. 드라마 ‘시크릿가든’(2010, SBS)에서 현빈과 하지원이 카페라테를 이용한 ‘거품 키스’로 만들어낸 명장면을 재현한 이 신 덕분에 드라마가 끝난 지 두 달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카페에선 비엔나 커피가 때아닌 유행을 타고 있다.
드라마에 등장한 ‘반쥴’ ‘가무’ 등 과거의 기억이 층층이 쌓인 카페들이 왕년의 인기를 다시 누리는가 하면, COE(Cup of Excellence) 등 스페셜티 커피를 취급하는 앞서나가는 로스터리 카페에서도 비엔나 커피를 찾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다. ‘응답하라 1988’ 같은 회에서 류혜영(성보라 역)은 고경표(성선우 역)에게 이렇게 말하며 데이트 신청을 하기도 했다. “선우야, 다음주 일요일 밖에서 볼까? 우리도 요새 유행하는 비엔나 커피나 한 잔 할까 봐.”
키스를 부르는 커피 비엔나
“비엔나에는 비엔나 커피가 없다”는 말이 흔하다. 비엔나 커피가 유래됐다고 알려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는 비엔나 커피의 이름이 ‘아인슈패너(einspanner)’이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다. 아인슈패너는 ‘말 한 필이 끄는 마차’라는 뜻인데, 비엔나의 마부들이 한 손에는 고삐를 쥐고 한 손에는 진한 커피에 크림을 듬뿍 얹어 마시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상상해 보자면, 문화의 산실 역할을 했던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를 오가던 당시의 택시 기사들이 테이크아웃해 먹던 커피쯤 되겠다.
좀더 상상해보면 비엔나 커피가 왜 마부들로부터 유래된 음료였을지도 쉽게 이해된다. 비엔나 커피의 요체는 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크림의 조합이다. 포장되지 않은 당시의 도로는 울퉁불퉁하게 패여 있었을 테고, 달각거리는 말의 발걸음에 따라 마차는 꽤나 요동쳤을 것이다. 뜨거운 커피를 들고 마시기는 도통 불가능했을 것. 비엔나 커피는 뜨거운 커피의 온도를 차가운 크림이 중화하고, 요동치기 쉬운 커피의 물성도 단단한 크림이 잡으며 뚜껑 역할을 한다. 단맛을 지닌 크림에 설탕까지 듬뿍 섞곤 했으니 노동자의 피로를 씻기에 좋은 음료였을 테고 말이다.
당시의 사정을 상상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엔나 커피의 정확한 ‘원조’ 레시피가 무엇인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뜨겁고 진한 커피, 그 위에 적당한 탄성이 생길 때까지 쳐서(whipped) 올린 차가운 크림, 그리고 취향에 따라 설탕을 섞는다는 큰 틀이 있을 뿐이다. 커피를 얼마나 진하게, 어떤 방향의 원두로, 우유를 섞을지 말지, 크림의 탄성은 어느 정도로 맞출지, 설탕은 커피에 넣을지 크림에 섞을지, 넣는다면 얼마나 넣을지, 커피와 크림의 비율은 얼마로 할지, 크림 위에 가니시를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 올린다면 어떤 것을 사용할지는 제각각 하기 나름이다.
그리하여 모든 비엔나 커피는 다르다. 각각의 완성도가 있을 뿐이다. 단 하나 공통되는 법칙이 있다면 커피를 저어 마시거나, 스푼으로 떠먹지 않는다는 것. 비엔나 커피를 마시는 법은 이렇다. 윗입술을 뾰족하게 쪽 빼고, 차가운 크림과 뜨거운 커피가 섞여 들어오도록, 마신다기보다는 빨아들이는 것이 요령이다. 그 모습은 과연 키스를 부르게 생겼다.
추억을 소환하는 근대 유산
비엔나 커피는 과거로부터 왔다. 서울에서 비엔나 커피가 유행한 것은 1988년, 혹은 현재만의 일이 아니다. 1970, 80년대, 그리고 90년대까지도 비엔나 커피는 카페의 주요한 메뉴였다. ‘응답하라 1988’의 청춘들이 1972년 문을 연 명동의 ‘가무’, 1974년 종로에 레스토랑으로 문을 열었던 ‘반쥴’에서 비엔나 커피를 마셨던 것은 서울 근대역사의 커피 풍경을 정확히 재현한 것이었다.
1956년 대학로, 당시 서울대 캠퍼스(의대 캠퍼스를 제외하고 1975년 관악구로 이전) 곁에서 영업을 시작한 학림다방은 서울의 요란한 근대역사와 함께 세월을 보냈다. 1987년 3월 20일 학림다방을 인수해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오너 바리스타 이충렬씨는 ‘응답하라 1988’ 시절의 비엔나 커피를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엔 크림이 없었어요. 대신 아이스크림을 넣었죠. 커피도 지금처럼 좋은 게 없었고요.” 인스턴트 커피가 커피 시장을 지배했던 그 시절의 영향인지 학림다방의 비엔나 커피는 거품 낸 우유를 섞은 커피 위에 단단하게 친 식물성 크림을 올리고, 커피에도 크림에도 설탕을 섞어 달콤한 맛을 낸다. 동시대의 맛, 혹은 원형을 추구하는 맛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의 완성도를 가졌다. 현대적이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장르다.
외국에서 견문을 쌓고 온 손님들 영향으로 학림다방은 커피 문화를 한 발짝씩 앞당겨 받아들였다. 오랫동안 원두를 로스팅하고, 남들보다 빨리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였다. 스모키한 향이 가득한 학림다방의 극단적인 강배전(다크로스트) 커피는 학림다방 특유의 달고 고소한 비엔나 커피로 변신해 이질감 없이 술술 넘어간다. 그 맛에 반해 학림다방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과거를 떠올리는 옛 손이고 SNS나 블로그를 보고 찾아온 새 손이고 만족하며 계단을 내려온다. 대학로가 조성돼 ‘차 없는 거리’로 특수를 누릴 때도, 드라마 ‘상속자들’(2013, SBS) ‘별에서 온 그대’(2013, SBS)에 등장해 외국인관광객을 끌어들였던 때도 변함 없는 대표 메뉴다. 여전히 그곳을 변함 없이 사랑하는 것은 함께 세월을 보낸 근대의 지식인들이지만 말이다. 학림다방을 찾았을 때, 서울대 한 학과의 73학번 동문들로부터 예약 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환갑을 지낸 그들의 옛 청춘은 그때처럼 달달한 비엔나 커피 맛으로 응답할 것이다.
SNS를 달군 장인들의 비엔나 커피
“커피 가게를 11년째 하고 있고 비엔나 커피는 이전에 했던 카페에서도 메뉴에 있었는데 지금처럼 반응이 열광적이진 않았죠. 비엔나 커피는 스페셜티 커피라는 화두 이후에 등장한 커피 트렌드예요. ‘응답하라 1988’ 방송 전부터 SNS 상에서는 이미 비엔나 커피가 화제가 되고 있었어요.” ‘입장까지 30분 대기, 음료 나오기까지 다시 30분 대기’. 마포구 망원동의 ‘커피가게 동경’을 찾는 사람들 사이 당연하게 통용되는 상식이다. 주택가 상가 건물 지하에 숨은 이 작은 카페는 요즘 SNS에서 가장 빈번히 회자되는 곳이다. 다름 아닌 ‘아인슈패너’가 이곳의 긴 줄을 만든 문제의 메뉴. ‘인생 커피’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열렬한 인기를 얻고 있다.
커피가게 동경의 아인슈패너는 가게 한가운데를 차지한 로스팅실에서 손수 볶은 갖가지 원두를 비엔나 커피에 맞게 배합한 핸드드립 커피로 만든다. 핸드드립은 조용한 대신 느린 커피다. 그러다 보니 지체가 생길 수밖에. 턴테이블이 조용히 돌아가고, 모차르트와 베토벤, 바흐의 음악이 흐르는 느긋함과 달리, 이재우 오너 바리스타는 카페가 문을 여는 오후 1시부터 영업이 끝나는 밤 10시까지 쉴 틈이 없다. 진한 커피 위에 얹는 크림은 동물성 크림과 식물성 크림을 배합해 일일이 친다.
커피가게 동경 외에도 광화문 ‘커피스트’, 마포구 서교동 ‘밀로 커피 로스터스’ ‘아이들모먼츠’, 합정동 ‘드니로’, 연남동 ‘228-9’ 등 카페가 ‘비엔나 커피 성지’로 젊은이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새로운 유행의 안테나 역할을 하는 홍대 앞에서는 ‘밀로 커피 로스터스’가 최고로 꼽힌다. 밀로 커피 로스터스에서는 비엔나 커피를 ‘몽블랑’이라고 이름 붙였다. 세 봉우리로 솟아난 새하얀 크림이 눈 덮인 알프스산 봉우리처럼 보여 황동구 오너 바리스타가 붙인 이름이다. 에스프레소를 희석한 아메리카노를 이용하는 이곳의 몽블랑은 커피가게 동경의 그것보다 두터운 질감으로 들어온다. 커피가게 동경이 커피 4, 크림 6의 비율인데 그보다 크림이 적다. 마찬가지로 크림은 동물성 크림과 식물성 크림을 배합해 손수 친다.
스페셜티 커피를 취급하는 로스터리 카페인 만큼 커피 원두도 세심하게 배합한다. “자극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맛을 추구해요. 고소하면서도 약간의 산미로 포인트를 주도록 하죠.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브라질, 에티오피아,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케냐 등 다양한 특징을 가진 원두를 그때그때 다르게 배합해요. 원두마다 맛이 다르고, 같은 원두라도 맛이 조금씩 다르니까 고정된 블렌드로는 일정한 맛이 나지 않아요.” 1994년 처음 커피 집을 연 황동구씨는 커피 마니아들 사이에 성실한 완벽주의자로 정평이 난 인물이다. 그 모습은 일견 평생에 걸친 장인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밀로 커피 로스터스만의 비엔나 커피를 만들고자 해요. 기왕 하는 거니까 남들과 똑같이 한다면 의미가 없죠. 나로 인해 뭔가 새로운 것이 생긴다면, 직업인으로서 기여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신실한 성의에 화답해 밀로 커피 로스터스의 추종자는 여전히 늘고 있다.
이해림 푸드라이터 herimthefoodwriter@gmail.com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
◆비엔나 커피의 친구들
비엔나 커피에는 가까운 친척들이 있다. 닮은 점은 커피 위에 크림을 얹었다는 특징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이리시 커피’다. 북쪽 바다 건너 있는 아일랜드에서도 커피에 크림을 얹어 마셨는데, 세계 제일의 주당 아일랜드인들답게 커피에 위스키를 타서 마셨다. 비엔나에서 남쪽으로, 에스프레소를 주로 마시는 이탈리아로 가서 커피 위에 크림을 올리면? ‘에스프레소 콘파냐’가 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