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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 분열된 이탈리아 치유를 꿈꾼 실천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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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 분열된 이탈리아 치유를 꿈꾼 실천의 사상가

입력
2016.02.2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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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여러모로 한국과 비슷하다. 두 나라 모두 반도라든가, 수도인 서울과 로마의 위도가 비슷하다는 식의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만성적 ‘사회적 분열’로 인해 시민들이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두 나라의 진정한 공통점이 있다. 남북분단과 지역갈등,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각종 사회문제로 얼룩진 한국사회의 딱한 사정은 길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이탈리아의 불행도 뿌리가 깊다. ‘장미의 이름’(1980)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작가요 언어학자로 최근 별세한 움베르토 에코는 이탈리아의 역사가 ‘분열의 역사’라고 말했다. 2011년 3월, 그는 프랑스 ‘르몽드’지와의 인터뷰에서 ‘형제살해’가 이탈리아의 고질병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다.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는 이것이 과연 한 나라인가 싶게 갈등의 골이 깊다.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도시들 간의 권력투쟁도 상상이상이다. 좌파와 우파의 갈등 역시 심하다. 게다가 각 정파의 내부사정도 어지럽기만 하다.

이탈리아의 분열은 중세 때부터 심각했다. 16세기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자국의 정치적 통일과 외세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며 ‘군주론’을 집필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역사의 험로를 뚫고 이탈리아가 정치적 통일을 이룬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그나마도 그 통일은 극히 불완전해, 사회적 갈등은 더욱 커졌다.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는 분열의 늪에 빠진 이탈리아를 구하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이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의 대표작 ‘옥중수고’에는 마키아벨리의 이름이 100번도 넘게 등장한다.

며칠 전 나는 로마를 여행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린 날 오전, 나는 공동묘지의 한 모퉁이에 자리한 그람시의 무덤을 찾았다. 그의 묘비 앞에 한 송이 붉은 꽃을 놓으며, ‘형제살해’의 비극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기를 빌었다.

독재자 무솔리니에게 목숨을 앗겨

그람시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0년대였다. 그는 20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사상가였지만,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냉전’의 난기류가 가장 혹심했던 한국에서는 그 이름조차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1926년 11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은 그람시를 체포했다. 불법으로 정당 활동을 했다는 죄명이었다. 그는 사실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눈엣가시였다. 그람시는 허망한 계급혁명론에 빠진 단순 소박한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그의 현실인식은 날카로웠다. “자본가를 비롯한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노동자들조차 세상을 움직이는 최선의 방식이 자본주의라 믿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혁명은 불가능하다.”

무솔리니는 그람시의 정확하고 입체적인 역사적 성찰이 두려웠다. 근대의 독재자들은 어디서나 공안검사를 동원해 정적들을 제거한다. 파시스트가 지배한 로마의 재판정에서 사건 담당 수석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위험천만한 그람시, 우리는 이 자가 앞으로 20년 동안 두뇌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해야 할 것이다.” 무죄한 그람시에게 20년 4개월 5일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무솔리니는 본래 사회주의자였다. 그람시와도 개인적 친분이 깊었다. 그런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손에 넣고 싶었던 무솔리니는 이념을 배신한 채 극우파로 변신했다. 집권에 성공한 그는 사회당과 공산당 등 진보진영의 정치참여를 일단 허용했다. 1924년의 총선에서 그람시를 포함한 10명의 공산당원이 하원의원에 선출된 배경이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본색은 금세 드러났다. 집권여당인 파시스트 국민당(PNF)을 제외한 모든 정당의 활동을 금지했던 것이다. 그람시의 죄명이라는 ‘불법적인 정당 활동’이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태어날 적부터 허약했던 그람시는 혹독한 수형생활을 견디기가 매우 어려웠다. 형기가 끝나갈 무렵 의사들은 그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고, 상부에 보고했다. 무솔리니는 슬며시 그람시를 풀어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난 1937년 4월 27일, 그람시는 숨을 거두었다.

‘옥중수고’를 쓰기까지

그는 빈곤과 좌절로 얼룩진 이탈리아 서부 섬 사르디니아 출신이었다. 청소년 시절, 무고한 광부와 농민들이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는 현실을 그는 자주 목격하였다. 마키아벨리가 그랬듯, 그 역시 이탈리아의 ‘아픔’에 괴로워했다. 청년 그람시는 사회당에 입당해, 새로운 이탈리아를 만들고자 했다.

극심한 가난과 병고로 결국 학업을 중단했지만, 그도 한때는 토리노대학교에서 그리스 문학, 역사, 철학, 언어, 법학 등을 폭넓게 공부하였다. 문장력이 뛰어났던 그는, 1919년 당내 좌파의 기관지 ‘신질서(Ordine Nuovo)’를 창간하였다. 1921년, 이 잡지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로 바뀌었다. 자본가와의 타협을 일삼던 사회당을 떠난 그람시 등이 공산당을 창당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자본가 및 퇴역군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급속히 성장하였다. 이탈리아의 장래가 더욱 어두워졌다. 분노한 그람시는 좌파연합전선을 주도하며 파시스트에 저항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선은 코민테른과 일치해, 소련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곧 체포되고 말아 진보진영의 정치활동도 물거품이 되었다.

옥중의 그람시는 여느 때처럼 부지런하고 생산적이었다. 병고 속에서도 그는 서구의 역사와 정치를 분석한 30권 가량의 메모, 즉 ‘옥중수고(Prison Notebook)’를 남겼다. 이 장문의 글을 통해 그는 파시즘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 까닭을 찾아냈다. 소시민은 물론 노동자계급조차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게 된 이유를 입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옥중수고’는 자본주의 국가의 안정성과 지구력을 심층 분석한 것으로 평가되며, 훗날 지식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문화적 헤게모니’를 비롯해, 그람시가 사용한 여러 개념들도 좌우 진영 모두의 공유물이 되었다.

평생 그는 성급한 계급혁명을 주장하지 않았다. 유물사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도 않았다. 사회주의가 결국 승리하고 말 것이라는 낙관론에 기울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문화’와 ‘의식’ 등 ‘상부구조’의 근본성격을 해명하는데 힘을 쏟았다. 루카치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던 것이다.

사회변혁의 주체는 ‘유기적 지식인’

그의 강점은 독특하고 깊이 있는 역사적 분석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분석할 때 농민들의 지지가 약했던 사실에 주목했다. 그와 달리 프랑스혁명은 농민들의 압도적인 성원이 있었기에 귀족의 특권을 박탈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았다. 양자의 차이를 비교한 그람시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특정한 사회세력이 지배권을 행사할 경우, 정치적 우위는 물론 지적, 도덕적으로도 지배적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 ‘문화적 헤게모니’의 장악 또한 지배의 필수요건이라는 지적이다. 국가는 공권력이라는 ‘강제’외에도 대중의 자발적 ‘동의’를 얻음으로써 통치권을 원활히 행사할 수 있다고 그람시는 보았다.

만일 분열을 극복하고 통합을 원한다면, 자파의 이익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통찰이었다. 자파의 이익을 양보하고, 다양한 정치 세력과 타협 또는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블록’이 형성된다는 것이 그람시의 확신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프랑스 조르주 소렐(1847-1922)의 지적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그들은 관습과 사회관계 및 이념의 통합을 바탕으로 새 세상을 열수 있기를 바랐다. 특히 그람시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소통을 강조했고, 그 주체로서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었다.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한 에코는 이탈리아를 ‘역사의 실험실’이라고도 불렀다. 일리 있는 말이다. 르네상스로 중세의 종말을 알린 것도, 무솔리니의 집권을 통해 현대사의 비극을 예고한 것도 그 나라였다. 지금은 자본이 정치를 압도해 정치권력이 사실상 실종된 ‘공위(空位) 시대’(문명과 문명 사이 공백기)이다. 50개의 대기업이 지구 총생산의 과반을 점유하는 기막힌 세상이다. 부패와 실업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이탈리아가 또다시 모종의 역사적 실험에 착수할 시점인 것도 같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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