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동안 122만 8,000명의 난민이 유럽연합(EU) 28개 회원국에 난민 지위를 신청했다. 이 숫자는 56만 6,000명이었던 2014년보다 두 배를 넘긴 규모인데, 이 숫자마저도 28개 유럽연합 회원국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터키를 포함한 유럽 38개국으로 조사 범위를 넓히면, 지난 한 해 동안의 신규 난민은 210만명으로 늘어난다.
슬라보예 지젝은 여섯 개의 시사 논평을 모은 ‘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글항아리ㆍ2016)에서 한 편의 글을 난민 사태에 할애했다. 그는 서방 국가가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벌이는 지정학적 국제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 침탈이 오늘과 같은 유럽의 재난을 불러 왔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유럽에 당도한 난민들은 “대체로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에 살고 싶어”하며, 그 가운데서도 “노르웨이에서 살고 싶어”한다.
난민 사태에 대한 지젝의 첫 번째 해결책은 유럽이 난민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들에게 품위 있는 생존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유럽은 자신들의 규칙과 제도를 새로운 정착민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난민들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그들은 또한 유럽 국가들의 법과 사회규범을 존중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삶의 방식이나 종교를 강제할 권리가 없으며, 모든 개인은 자신이 살아온 공동체의 관습을 포기할 자유를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를 선택한다면 그 선택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가리지 않기를 선택한다면 그렇게 할 자유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 일련의 원칙들이 서유럽식 삶의 방식에 은밀히 특권을 부여하지만, 그것은 유럽이 난민들을 환대해주는 대가다. 이들 원칙은, 필요하다면 강압적 조치로 분명하게 언명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먼저 지젝이 말하는 “유럽 국가들의 법과 사회규범”, 곧 ‘유럽적 가치’가 종교를 상대화할 수 있는 무신론자의 권리라는 점을 명심해 두자. 유럽이 성취한 근대는 무신론으로부터 나왔으며, 유럽은 무신론의 대륙이다. 그런데 유럽에서 세계로 퍼져나간 지 오래인 지당한 가치가 대부분이 무슬림인 최하층 난민들에게 “강압적 조치로 분명하게 언명되고 집행”되어야 한다니, 저렇듯 강경한 어조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유럽의 패색(敗色)이다. 안타깝게도 지젝의 제안과는 반대로, 유럽에서는 강압적으로 언명되고 집행되어야 할 여러 법과 사회규범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중이다.
2011년 7월22일, 노르웨이의 극우주의자 안데르시 베링 브레이빅이 노동당 청년 여름캠프에 난입해 77명의 청소년을 살해했다. 이 살인마는 고작 21년형을 받고, 감옥에서 오슬로 대학의 정치학 과정에 등록했다. 그는 현재 ‘커피가 차갑게 나왔네’ ‘빵에 바를 버터가 모자라네’ 하며 불만을 토로하거나, 교도소의 인권이 열악하다면서 굶어 죽을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노르웨이가 대단하다는 것은, 브레이빅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노르웨이 시민들의 청원 운동이 없었던 것으로 충분히 증명된다. 하지만 이 강한(?) 노르웨이도 ‘나는 브레이빅보다 더 많은 100명을 죽일 거야’라는 악의 앞에서는 무력하다. 우리는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 행해지는 신체형을 야만으로 성토하지만, 77명을 죽이고도 인권타령을 늘어놓으며 공부를 할 수 있는 노르웨이야말로 ‘새로운 야만’이라고 명명해야 한다. 노르웨이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2013년 이탈리아의 피렌체 근처에 있는 도시 프라토에서 일어난 의류공장 화제 사건 역시 자본주의의 공세 앞에 무너져가고 있는 유럽의 또 다른 야만화를 보여준다. 프라토의 지방 행정 당국은 중국인이 소유한 4000여개의 업체에 소속된 이주노동자 1만 5,000명의 인권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이처럼 법과 사회규범이 해체되어 가고 있는 문명의 무주지(無主地)로 그들만의 법과 사회규범으로 무장한 무슬림이 들어온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관용과 같은 자유주의적 전술은 이미 실패했고, 이 싸움을 누구보다 더 잘 해낼 스탈린(공산주의)은 옛날에 죽었다. 유럽이 믿고 기댈 마지막 수단은 극우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인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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