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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히피 축제에서 보낸 사흘

입력
2016.02.1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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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라니. 이미 지나간 유행이 아니었나. 대걸레자루를 꽂은 것 같은 머리 모양, 알록달록한 옷에 가죽 부츠, 온 몸을 캔버스 삼아 과감하게 새겨 넣은 문신, 맨발에 다 낡고 해진 배낭 차림. 자유로운 기운을 내뿜는 사람들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히피 축제에 와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붐비고 소란스러운 자리라면 질색인 내가 소문에 홀려 찾아온 곳이었다. 태국 북부 산골마을 치앙다오에서 해마다 벌어지는 히피 축제 샴발라. 티베트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이상향의 이름을 딴 축제였다.

샴발라 축제는 여러 면에서 특이했다. 우선, 축제라면 어디나 따라오는 소란이 없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긴 밤의 끝에 이어지는 고성방가나 주먹다짐 같은 것도 없었다. 주변이 쓰레기더미로 변해버리는 일도 없었다. 자정이 되면 다들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고, 아침이 오면 강변에 모여 요가를 했다. 낮에는 인디언 텐트 안에서 늘어져 쉬다가 설핏 해가 기울 무렵이면 저마다 노점을 펼쳤다. 웃는 얼굴이 화사한 한국 처녀는 인도여행비를 마련하기 위해 캐리커처를 그렸고, 팔뚝에 용 문신을 한 스페인 청년은 직접 만든 실 팔찌를 팔았고, 머리에 두건을 두른 ‘원조 히피’ 일본 할아버지는 드립 커피를 내렸다.

다른 쪽에서는 삼삼오오 모여든 이들이 즉석 공연을 열었다. 트럼펫을 부는 어린 소년, 대나무 가지를 꺾어와 두드리는 할아버지, 캐스터네츠를 양 손에 든 할아버지, 우쿨렐레를 치는 처녀, 봉고를 두드리는 청년,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거나 허밍으로 화음을 넣는 사람들이 아코디언을 켜는 청년의 지휘를 따랐다. 아마추어들의 순수한 기쁨이 배어 나오는 흥겨운 합주였다. 지나가던 이들이 자리를 잡고 서서 몸을 흔들고, 주저앉아 맥주를 마시며 발을 맞췄다. 그런 자리들이 야영장 곳곳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밴드의 공연이 열렸다. 일본과 태국의 15개 밴드가 참여했는데 유명세와 상관없이 모두 ‘노 개런티’ 공연이었다. 낮에는 자원봉사자로 부엌에서 밥을 짓던 청년이 저녁이면 드러머로 변신했다. 이 축제를 주최해온 일본 가수 마사토 할아버지는 젊은 청년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했다. 록 밴드가 등장하면 모두들 일어나 열심히 춤을 췄다. 본 공연이 끝난 어느 밤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퍼커션 오픈 잼’이 열렸다. 퍼커션의 리듬에 맞춰 화려한 불춤을 추는 이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산 속의 밤이 매일 춤과 음악으로 깊어갔다.

히피 축제라면 피가 뜨거운 청춘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이곳에는 60~70대의 연세 지긋한 분들도 많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참여한 30~40대도 많았다. 청년과 노인이, 아이와 어른이, 서양인과 아시아인이, 주민과 손님들이 격의 없이 어우러졌다. 마을 주민들은 노점을 열어 파타이나 꼬치구이를 팔았다. 공연 때마다 마을 주민들을 배려하고 존중해달라는 당부가 빠지지 않았다. 밤 9시 이후에는 주민들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길을 우회할 것, 비키니 차림으로 바깥을 돌아다니지 말 것, 쓰레기는 분리 수거할 것 등등.

비틀스의 노래 가사처럼 국가도, 종교도, 소유물도 없이 모두가 평화 속에 살아가는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외부의 도움 없이 자원봉사들의 도움만으로 벌써 일곱 번째 치러지는 축제였다. 평생을 방랑자로 노래하며 살아온 일흔두 살의 마사토 할아버지는 이 축제가 다정하고 여성적이면서도 작은 축제로 남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렇게 자연 속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살아가는 게 인간다운 삶이라고도 했다. 더 이상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살아가고 싶다고도 했다. 평생 일관되게 살아온 몽상가 할아버지 덕분에, 그의 뜻에 동조한 젊은 친구들 덕분에, 나 같은 이도 이런 세계에 잠시나마 발을 디뎌볼 수 있었다. 아름답고 고마운 날들이었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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