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한
사람 손길 미치지 않은 제주의 허파
6.5㎞ 탐방로 작년 7월에 선보여
금새우난초 등 희귀 식물 14종에
천연기념물 황조롱이 등 서식
숯가마터 등 역사의 흔적도 곳곳에
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곶’과 덤불을 의미하는 ‘자왈’이 결합한 제주어다. 말 그대로 나무와 덤불만 무성한 쓸모없는 불모지다. 그렇기 때문에 곶자왈은 오랫동안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고, 지금은 희귀 동식물을 비롯해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가 됐다. 곶자왈은 겨울철에는 따뜻하고, 여름철은 시원한 환경을 지니고 있어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곶자왈은 제주 사람들의 생명수인 지하수의 원천이기도 하다. 빗물이 곶자왈 용암지대를 통한 땅속으로 들어가 지하수를 만든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곶자왈을 ‘제주의 허파’라고 부른다. 제주도 전체 면적의 6%(110㎢)를 차지하고 있는 곶자왈 중 보전상태가 양호한 제주도 서부의 한경ㆍ안덕 곶자왈, 애월 곶자왈, 그리고 동부의 조천ㆍ함덕 곶자왈, 구좌ㆍ성산 곶자왈 지대를 제주의 4대 곶자왈이라 한다. 제주의 속살 같은 곶자왈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한경ㆍ안덕 곶자왈 지대에 포함된 제주곶자왈도립공원을 찾았다.
지난 14일 오후 제주시내 도심에서 30여분 차를 달려 서귀포시 대정읍 제주영어교육도시 인근에 위치한 제주곶자왈도립공원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공원 탐방안내소 건물을 돌아 탐방로 입구에 서자 빽빽한 나무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한두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흙길을 따라 몇 발자국을 내딛자 그 곳에는 또 다른 녹색세상이 펼쳐졌다.
불과 한두 시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과 차량들로 북적이던 세상에 서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한 순간에 사라진 듯 짙은 녹색의 나무들과 무성한 풀들, 그리고 바람소리만 들려왔다. 한 겨울에 녹색으로 뒤덮인 곶자왈 숲 속은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딴 세상처럼 보였다.
하늘을 덮은 원시림 사이로 조금씩 스며드는 햇빛을 따라 걷다 보면 녹색이끼를 뒤집어 쓴 크고 작은 바위들과, 그 척박한 돌 틈 사이로 힘겹게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서로 뒤엉켜 있다. 또 바위들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 주변에는 겨울 추위도 잊은 고사리 등 양치식물과 이름 모를 풀들이 넓은 이불처럼 뒤덮고 있었다. 탐방로도 일부 나무테크 구간을 제외하고는 과연 길이 이어질까 걱정이 들 정도로 돌투성이에 나무와 덩굴이 앞을 가로막는다. 일반적인 산 속 숲과는 다른 모습이다.
30여분을 걷다 갑자기 드러난 숲 속 한 가운데 공터. 15m 높이의 전망대가 불쑥 솟아 있다. 전망대 맨 꼭대기에 서서 바라본 곶자왈도립공원은 녹색의 바다처럼 보였다. 그 너머 남쪽에는 눈이 쌓인 한라산이 저 멀리 자리잡아 앉아 있었고,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리자 산방산과 파란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또 탐방로를 따라가다 보면 숨어 있던 제주의 역사 문화자원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제주 4ㆍ3사건 당시 마을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석축과 참호, 숲 속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종가시나무로 숯을 만들었던 숯가마터, 그리고 과거 방목지로 사용했을 당시 소와 말에게 줄 물을 담아두던 ‘우마급수장’이 남아있다.
수많은 희귀 동식물들도 사람들의 손길에 벗어나 숲 속 곳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지난 2011년 도립공원 지정에 앞서 이뤄진 조사에서 멸종위기 2급 환경부 지정 보호식물인 개가시나무, 검정개관중, 밤일옆, 개족도리, 가는잎할미꽃, 금새우난초 등 희귀식물 14종이 자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애기뿔소똥구리 물장군, 조롱이, 말똥가리 등이 분포하는가 하면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와 꿩 등 조류 7종, 노루 오소리, 제주족제비 등 포유류 7종, 무당벌레 등 곤충류 106종 등이 서식하고 있다. 그야말로 ‘생태계의 보고’다.
제주곶자왈도립공원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사회공헌 사업으로 6년간에 걸쳐 57억원을 들여 조성, 지난해 7월 문을 열었다.
곶자왈도립공원에는 전체 길이 6.5㎞에 이르는 탐방로와 휴게쉼터, 탐방안내소, 생태전망대, 생태체험학습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탐방로는 오찬이길과 빌레길, 테우리길(이상 1.5㎞), 가시낭길(1.1㎞), 한수기길(0.9㎞) 등 5개 코스가 서로 연결돼 있으며 약 2시간3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오찬이길은 신평리 공동목장 관리를 위해 만든 길로, 주변 일대에 개가시나무와 애기뿔소똥구리, 물장군, 팔색조 등 대표적인 식생이 서식하고 있다.
빌레길에서는 숯을 굽던 장소인 숯가마터와 우마급수장 등을 볼 수 있고, 한수기길에서는 용암류 지질 및 화산 지형을 관찰할 수 있다. 테우리길은 한수기오름 입구에서 우마급수장으로 이어지는 탐방로로, 원형 함몰지에서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가시낭길은 곶자왈 원형 그대로를 가급적 보존한 탐방로로 만들어졌다.
JDC는 또 곶자왈도립공원 인근 대정읍 신평리에 있는 폐교인 보성초등학교 신평분교장을 생태문화체험학교로 조성했다. 이 곳에는 곶자왈의 가치를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곶자왈의 수목 및 식생을 재현한 생태교육존이 있다. 숯가마터, 움막, 노루텅(야생 노루를 잡기 위한 함정) 등 곶자왈 생활 유적을 재현한 생활유적교육존, 곶자왈 생태교육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실내 생태학습장 등도 갖춰 곶자왈내 자연생태 및 인문환경을 학습할 수 있도록 했다.
곶자왈의 환경적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년전이다. 그전까지는 불모지로 인식되면서 난개발에 훼손돼 큰 상처를 입었다. 최근 들어 제주 생태계의 마지막 보루인 곶자왈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행정은 물론 민간 차원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제주곶자왈도립공원도 이처럼 곶자왈의 가치를 공유하고, 보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탄생했다. ‘제주의 허파’ 곶자왈에서 제주섬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걷다 보면 복잡한 세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제주=글ㆍ사진 김영헌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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