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는 왜 개성이 휴전회담 장소로 채택됐느냐다. 고려의 옛 수도 개성은 서울에서 약 50km, 평양까지는 약 130km 떨어진 전략적 요충지로 전쟁 이전 분계선인 38도선 아래, 즉 남한 땅에 위치해 있었다. 휴전 회담 당시 서울과 평양 모두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개성이 최초의 장소로 확정됨에 따라 훗날 한반도의 안보 지형에 미친 영향은 심대하다.
▦ 유엔군과 중공군의 일진일퇴 공방 끝에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1년 6월 소련의 제안으로 전쟁당사국들은 휴전을 고려하게 된다. 당시 중공군은 자신들이 장악한 개성을 회담 장소로, 유엔군은 원산항에 정박 예정이던 중립국 덴마크의 병원선 유트란디아호를 제안했다. 워싱턴 수뇌부는 개성을 최종 결정하지만 당시 유엔군사령관인 매튜 리지웨이 장군은 “회담 시작부터 우리는 일찌감치 후회하게 될 양보를 하고 말았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 전쟁의 중립지대로 합의되면서 서부전선 요충지인 개성 일대는 유엔군이 침범할 수 없는 지역이 됐다. 서부전선보다 동부전선에 공세를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뒤늦게 전략적 가치를 인식한 유엔군이 1년 뒤 개성에서 8km 떨어진 판문점으로 회담 장소를 관철시켰지만 공세 실패 후 전열을 재정비할 상당한 시간을 가졌던 중공군을 밀어내지 는 못했다. 개성 회담과 관련한 워싱턴의 판단과정과 배경은 지금도 여전히 모호하고 설도 분분하다. 미국과 영국간의 휴전 협의 과정에 영국 외교관으로 활동한 소련 스파이 배후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기도 한다.
▦ 북한의 ‘서울 불바다’ 협박에서 보듯 북한군 화력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된 연원도 개성 회담이다. 김대중 정부 당시 개성공단 조성, 노무현 정부 당시 서해평화협력 지대 합의도 일종의 안전지대를 구축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북한의 김정일은 개성공단과 관련해 “군대를 후방으로 이동 배치하면서 군부를 무마하는 데 힘이 들었다”며 생색을 내기도 했다. 아들 김정은의 핵 도발이 개성공단 폐쇄를 부르고, 서울의 안보 리스크도 올라가게 됐다. 미 국방부 아태지역 부국장을 지낸 척 다운스는 북한과의 협상을 다룬 자신의 책 ‘Over the Line’에서 개성 회담을 미국 협상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실패 사례라고 했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